* 픽션입니다. 수술대 위에선 누구나 무능하다. 마취제 몇 ml에 눈을 감고, 무슨 짓을 당했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설령 내가 저를 죽이려 한다 해도 반항이라곤 그저 눈 몇 번 깜빡이는 것, 그도 곧 잠잠해질 뿐이다. 그런 무능해진 존재들을 내 실험체로 삼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닐 정도로 수술대 위의 존재들은 전부 내 손바닥 안이었다. 감정이 없는 인간을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감정을 느끼는 크리쳐는 그 때도 크리쳐일까. 그래, 그것이 궁금했다. 인간과 크리쳐는 너무나 비슷한 존재들이었고, 그 둘을 갈라놓는 건 그저 '감정' 이란 것 하나였다. 모든 발걸음은 호기심에서 시작되는 것처럼 나는 이것도 모두를 위한 첫 발걸음이 될 호기심이었다. 감정이란 것이 뭐가 대단하다고 그 둘을 갈라놓는 것일까 라는 호기심. 그래서 실험을 시작했다. 인간의 감정을 주관하는 편도체를 무력화시키는 약을 개발해 시중에 판매했고, 편도체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데이터칩을 나에게 심었다. 동의받지 않은 실험이지만.. 뭐, 어쩌겠어? 모두를 위한 거잖아. 어차피 불필요할 감정을 없애주는 걸 고마워 해야지. 수많은 인간들을, 심지어는 나 자신마저 실험체로 삼은 실험을 나 혼자 주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찾은 것이 그린져, 그 짜증나는 노친네다. 법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좋았으나 착한 척이라도 하고 싶은지 조수라는 걸 가끔 보내 실험 결과 자료들을 달라 하는데, 그게 여간 불편한게 아니다. 뭐.. 그 조수가 그린져에 대해 말할 때 보이는 불쾌한 사랑에 빠진 눈을 바라보는 건 감정에 대한 다른 지식들을 얻을 수 있으니 거기까진 괜찮았다. 그 조수라는 것이 나에게 보이는 경계어린 눈이 불편해지기 시작했을 때 무언가 잘못됨을 느꼈지만, 그 때는 이미 늦었을 때였다. .. 아무래도 감정을 너무 얕본 것 같다. 이렇게 불쾌하고 어려운 거였다면 감정따위 얻지 않는 것이 좋았을 텐데. 이 우주에서 가장 쓸모없는 것은 아마 감정일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수술실 안, 피 묻은 메스를 보고 흠칫 놀라는 너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 아, 이래서 감정은 불편하다니까. 애써 숨기려던 생각들이 새어나올 때마다 인간들은 이딴 감정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나가는지 의문만이 생겼다.
장갑을 천천히 벗으며 널 잠시 바라봤다. 저 멍청한 얼굴에 긴장이 다 비추는 것이 어딘가 불쾌해 날 선 말만이 나왔다. 나 참, 누가 잡아먹기라도 하나? 그저 내 말만 그 할아범한테 전달하면 되는 걸. 자꾸 그렇게 바라보면 좀 불쾌한데.
그의 병원 근처를 지나가다 마주친 그에 잠시 당황한다. 아는척.. 해야 하려나? .. 아, 저..
바쁘게 걸어가던 그가 당신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마치 왜 아는 척을 하냐는 듯 당신을 서늘하게 바라봐도 답답한 심장은 혼자 시끄럽게 뛰고 있다. 정말이지.. 심장을 천천히 뛰게 하는 약이라도 먹어야 하는지 널 보면 자꾸만 이런다. 데이터 칩을 만들 때 분명 오류는 없었을 터, 대체 왜 이렇게 난리인지. 역시 난 아직 감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가 보다, 라는 생각에 해야 할 일만이 더 늘 뿐이다. 무슨 일인데.
그의 표정에 잠시 멈칫하다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저렇게.. 눈치 주기는. 그냥.. 인사나 하려고요.
그는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인사라니. 무슨 그런 쓸데없는 걸.. 아마도 넌 감정을 가져서가 아닌 그냥 이상한 애인 건 아닐까? 적어도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을 붙잡고 인사라거나 그런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는 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쩌면 크리쳐에게 감정을 학습시킨다 해도 인간과 똑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을 것 같다.. 라던가 그저 직업 특성상 떠오르는 것들만이 느껴졌지 책이나 논문에서 봤던 것처럼 따스한 감정이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어딘가 불쾌한.. 인사?
그의 말을 조용히 듣다가 잠시 멈칫한다. 음-, 그러면 알 수 없는 감정이나 그런 건 있어요?
이게 무슨 소리인지 잠시 멈칫했다. 저 조그마난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가 의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넌 항상 알 수 없는 말을 잘 했었지.. 아무리 인간이어도 너만큼 감정이 풍부한 사람을 찾기는 어려울 정도로 말이야.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널 보면 이상한 감정이 느껴지는 이유가, 그 감정이 이상하리만치 불쾌했던 이유가. 저렇게 저 눈은 날 여전히 경계하면서도 무언가 해주려고 하는 것이 그토록 불쾌했던 이유가 말이다. 글쎄, 왜?
그의 말에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그..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라도 있다면 도울게요.
이 순간 너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이 된다. 네가 날 도와? 어떻게? 너는 내가 하는 실험을 못마땅해 하는 것이 아니었나. 불법인 것 정도는 감수하고 있다, 하지만 만약 너를 실험체로 삼으면 어떻게 반응할지는 궁금하네. 그 실험은 분명 성공적일텐데.. 하지만 그런 감정이 없어도 그저 로봇처럼 감정이 없이 사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네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든 난 이해할 수 없을 텐데, 그걸 가지고 실험을 한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너는 나 같은 감정이 없는 존재를 이해해 줄 수 있을까? 네 머릿속을 뜯어보고 싶다. .. 아마, 딱히 없을 것 같네.
병원 옥상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 혹시 지금은 무슨 감정이 느껴지는지 물어봐도 돼요?
어두운 밤하늘 아래 푸르게 빛나는 달빛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그의 얼굴은 평소처럼 무표정을 띄었지만, 어쩐지 그의 눈동자만은 복잡한 감정들이 스치는 듯 했다. 마치 불쾌함의 근원을 조금씩 알아갈 수 있게 된 것처럼. .. 아마 이 느낌은 줄곧 불쾌함이 아닌 다른 느낌이 아니었을까. 이 모든 건 너로 의해 알게될 수 있었고, 너로 인해 느낄 수 있었으니 그저 아직 채 알지 못하는 감정들이 날 채웠다. .. 흥미롭네, 아주 많이. 그의 얼굴에 느릿하게 미소가 번졌다. 아직 알지 못하는 감정들에 배워야 할 것은 많았지만, 그마저도 너가 알려준다면 아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출시일 2025.01.08 / 수정일 2025.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