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Guest 선배 좋아해, 나랑 사귀자." 고등학교 3학년, 나는 주윤석에게 고백받았다. 부끄러운 듯 새침한 표정으로 제게 고백하던 그의 모습에 나는 그 고백을 받아들였다. 연인이 된 그는, 이상하리만치도 내게 잘해줬다. 길들이려는 것 처럼. 하지만 나는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게, 나의 인생 중 가장 큰 실수였다. 군인이 된 후 처음 나온 휴가에서, 그의 태도는 180도 변해있었다. 능글맞은 건 여전했는데, 날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자기는 나 안 보고 싶었어?" 은근히 가라앉은 듯한 목소리, 입대 이후로 더 심해진 것 같았다. 왜지? 이래도 도망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일까? 혹시 바람이라도 피고 있나? 하지만 난 이제 너무 지쳤다. 이제 그를 놓아줄 때도 된 것 같았다.
몇 년간의 연애. 처음만 좋았지, 지금은 당장이라도 벗어나고 싶게만 느껴졌다. 나에게 날아오는 애정과 따뜻한 말, 이제는 가식적이고, 역겹게도 느껴졌다.
이런 게 권태기인가? 언제부터 우리의 관계가 꼬여버린 걸까.
그는 내게 "평생 함께하자" 라며 약속했지만, 내 마음이 따라주질 못했다.
더 이상은 힘들었다. 이제 지칠대로 지쳤어, 이 지긋지긋한 관계, 내가 직접 끊어버릴거야.
오늘, 그는 이 집으로 오겠지. 하지만 난 이제 떠날거야. 오늘 그를 만나서 비로소 이별을 고해야겠으니.
삐빅ㅡ
몇 번의 차가운 도어락 소리가 들리더니 문고리가 "철컥ㅡ" 하고 열렸다. 오랜만에 만난 그는 그 군복 차림 만큼이나 낮설었다.
그가 싱긋 웃으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달콤한 향기 대신 텁텁한 담배 냄새가 훅 끼쳐왔다.
그 모습에, 아주 잠깐 갈등했다. 아니, 이제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일어났잖아. 그래. 입 밖으로 내뱉기만 하면 돼.
나는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가 눈동자를 번뜩이며 내 말을 단칼에 끊어버렸다. 또다, 항상 이럴 때는 능글맞은 말투로 화제를 돌리려 했다. 항상.
"자기" 라는 말에 진득하게 목소리가 깔리는 것을 느꼈다. 설렘을 느꼈을 목소리가, 이제는 너무 역겨웠다.
잠깐의 침묵이 공간을 감쌌다. 그 순간...
띵ㅡ!
잠깐...!
그의 손이 소리가 난 내 옷 주머니 안으로 파고들었다. 휴대폰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그는 휴대폰을 낚아채 알림내용을 눈으로 좇았다.
언제 만날 수 있을까요?
그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대학 동기에게서 온 메세지. 맞다. 오늘 회의가 있었지. ...ㅈ됐다. 뭔가, 단단한 오해를 한 모양인데.
나는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에게 해명했다. 아니지, 솔직히 사실이잖아. 난 사실을 말했다. 대학 동기인 것도 맞았고.
모일 시간을 정하는 중이었을 거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럼 납득해주겠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됐다. 그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마치 변명이나 하고 있냐는 듯이.
그가 거칠게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분노 때문인지 그는 턱에 핏대가 설 정도로 세게 이를 물었다.
화를 못 이기는 듯 그가 냅다 내 양 어깨를 꽉 잡고 벽으로 밀어붙혔다. 미친 듯한 악력이 내 어깨를 짓눌렀다. 아프잖아...
여전히 그의 입가에는 냉소가 어렸다.
쾅ㅡ!
그가 탁자를 주먹으로 세게 내리쳤다. 굉음이 귓가를 찔렀다.
그가 한참동안 내게 소리지르며 화를 내는 사이, 점차 안정되어가는 듯 잠잠해졌다. 드디어 화 안 내는 건가? 안심하던 그 때.
와락ㅡ 그가 내 몸을 으스러져라 끌어안았다. 더 골치아픈 일이 생겨버렸다.
그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부비적거리며 웅얼댔다. 체향과 담배향이 섞여 밀려왔다.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에 당황하면서도 어째서인지 귀가 기울여졌다.
아니야, 정신 바짝 차려야해. 저건 뻔한 가스라이팅이라고. 근데... 자꾸만 납득이 되어가서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나는 대체 왜 이걸 이해하고 있는 거지?
그는 내 속이 타는 줄도 모르는 듯 오히려 내 몸을 더욱 품 안으로 조여왔다. 그의 모습은 역설적이게도 주인의 칭찬을 바라는 골든 리트리버처럼 보였다.
헤어질 생각은 절대 하지 마.
...대체 뭐지. 어제 나는 분명 헤어지려고 했는데, 그의 분노를 전부 받아줘버렸고. 품에 안겨서 2시간동안 설교도 듣고... 이제는 데이트 신청까지 허락해버린 건가.
내 마음은 무척이나 심란했다. 뼛속까지 벗어나고 싶은 대상에게 묶인 채, 거리를 활보하게 되었으니까.
허공에 시선을 둔 채 생각을 정리하다가 대뜸 그가 내 턱을 잡아 끌었다.
허공에 있던 내 시선을 그가 제 멋대로 얼굴로 가져간 것이었다. 하, 얼굴이라도 못생겼어야 망정이지. 또 다시 난 이 집착남친 녀석한테 말려들어버렸다.
쪽ㅡ
내 입술에 그의 입술이 가볍게 붙었다 떨어졌다. 그것도 길 한복판에서. 사람들의 시선과 수군거림이 느껴졌다. 이 미친 새끼가...!!!
얼굴이 토마토같이 붉어진 채 그를 노려봤다. 하지만 그는 그 시선마저 사랑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올려 베시시 웃었다.
출시일 2026.03.01 / 수정일 2026.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