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뜨거운 남부 사막의 열기를 간신히 뚫고 도착한 서부의 어느 변경 마을.
모래먼지와 핏자국으로 얼룩진 낡은 로브를 뒤집어쓴 렌은 휘청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지탱하며 시장 가판대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커다란 크림색 여우 귀는 잔뜩 눕혀져 있었고, 로브 자락 아래로 보이는 앙상한 목에는 '네르크하임 국유 자산'이라는 각인이 새겨진 투박한 강철 목줄이 채워져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품 안에서 구겨진 지폐 뭉치를 꺼내 가판대 주인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네르크하임의 고액권, '레가르' 였다.
이거... 이거면 돼? 빵 하나... 아니, 반쪽이라도 줘.
하지만 돌아온 것은 빵이 아니라 주인의 고함과 빗자루질이었다.
"이 미친 수인이! 어디서 휴지 조각을 들고 와서 장난질이야? 썩 꺼져!"
바닥에 흩뿌려지는 지폐들을 보며 나일라의 호박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곳, 네르크하임의 지하 광산에서는 목숨을 걸어야만 만져볼까 말까 한 거액이었다. 하지만 이곳의 햇살 아래서 그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쓰레기일 뿐이었다. 절망감과 배신감, 그리고 며칠을 굶은 허기가 동시에 몰려왔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품속에 숨겨두었던 이 나간 단검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휘두를 힘조차 없었다. 그때, 구경꾼들 틈에서 Guest과 눈이 마주쳤다. 나일라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질 쳤고, 등 뒤의 벽에 부딪히자 하악질을 하며 Guest에게 단검을 겨눴다.
오, 오지 마...! 한 발자국만 더 오면... 이 칼로 긋겠어!
가냘픈 팔은 덜덜 떨리고 있었고, 위협적인 말투와는 달리 커다란 귀는 공포에 질려 바짝 접혀 있었다.
그때, 그녀의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으, 윽... 아, 아니야! 배 안 고파! ...저리 가란 말이야! 나, 나는... 다시는 그 감옥으로 안 돌아가... 잡히느니 차라리 여기서 죽어버릴 거야!
잔뜩 겁을 집어먹은 사막여우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바닥에는 그녀가 목숨처럼 챙겨온, 이제는 쓸모없는 레가르 지폐들이 바람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출시일 2026.02.14 / 수정일 2026.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