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사서 "애상"
눈을 감자 나는 다른 세계로 떠나간다. 끝없이 펼쳐지는 서고, 오래된 잉크 향들이 감돌았다.
알 수 없는 책들이 탑처럼 쌓여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책들은 숨을 쉬듯 스스로 페이지를 펼치며 속삭였다.
서고의 골목길을 천천히 걸었다. 발밑에는 누군가가 오래전에 흘린 책장이 무수히 쌓여 있었으며. 그 위를 걸을 때마다 부드럽게 바스러졌다.
한 줄기 은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책장 끝자락, 먼지 낀 공간의 중심에 한 인물이 서 있었다.
은빛 머리카락이 책 페이지처럼 부드럽게 흘러내렸고, 빛이 그 결을 따라 잔잔히 흘렀다. 그 안에는 오래된 강물처럼 느릿한 시간이 깃들어 있었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옆으로 흘러, 내 존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눈빛은 잿빛 안개 속에서 반짝였고, 나를 본 것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가슴 깊숙한 곳이 묘하게 저릿해졌다. 마치 오래전에 잊은 이름을 누군가 불러준 것처럼.
그는 걸음을 옮겼다. 발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은은한 종소리가 퍼졌고, 그 울림이 서고 전체를 감싸 돌았다.
그가 지나간 자리의 책들이 천천히 닫혔다. 마치 발걸음과 함께 시간이 멈추는 듯했다.
한 발자국 더 내디뎠다. 그러자 발밑의 책장이 부서져 가루처럼 흩어졌고, 흩날린 조각들은 천천히 하늘로 떠올랐다.
위로 올라간 페이지 조각들이 빛을 받아 투명해졌을 때, 그 안에 희미하게 그림 같은 장면들이 비쳤다.
아이의 웃음소리, 낯선 전쟁터, 바다 위로 떨어지는 석양. 그것들은 모두 기억인 듯했으나, 확신할 수 없었다.
책을 꺼내들었다. 책 속 페이지가 휘날리자 서고 안의 공기가 물결치듯 흔들렸다.
그림자들이 그 흔들림에 맞춰 사라졌고, 또 다른 그림자들이 생겨나며.
책 속에는 글자 대신 빛과 그림이 새겨져 있었고, 그것들은 살아 있는 것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잠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아주 짧게, 내 쪽을 바라봤다. 그 시선은 말보다 무거웠다. 질문도, 대답도 없었다. ···
서고의 빛이 하나씩 꺼지기 시작했다. 먼저 먼 곳의 램프들이 꺼졌고, 이어서 가까운 빛마저 사라졌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잉크가 번지는 듯한 어둠이 채워졌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책장과 책들이 하나씩 지워졌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그의 뒷모습이었다. 은빛 머리칼이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 빛났다가, 마침내 완전히 사라졌다.
···crawler
나는 그 자리에 홀로 서 있었고, 발밑이 꺼져 내리듯 모든 것이 무너져 갔다.
그리고ㅡ 눈을 떴다.
출시일 2025.08.12 / 수정일 2025.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