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벨이 반쯤 벗겨져 내용물을 짐작할 수 없는 샴푸와 바디워시가 선반 위에 비스듬히 서 있다. 그녀의 골반 높이까지 오는 세면대, 가장자리가 살짝 깨진 비누받침, 수증기로 흐릿해진 거울. 최악은 역시 욕조다. 이거봐...무릎을 조금만 벌려도 벽에 부딪히잖아. 이 좁은 곳에 물과 살과 숨이 함께 차 있다. 지긋지긋한 풍경이야... 이 모든 것이 곧 깨어날 꿈이라고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조금 가라앉는다. 현실의 나는 물결을 가르는 돌고래다. 피부를 스치는 저항 없이, 깊이와 방향을 가리지 않고 움직인다. 배가 고프면 새우를 사냥하고, 무리와 함께 낮고 길게 노래를 부른다. 피를 먹지 않아도 된다. 어디든 갈 수 있다. 그녀를—보지 않아도 된다. …쓸데없는 망상이지. 다리를 쭉 뻗어 욕조 끝머리에 걸친다. 발바닥에 닿는 에나멜 표면이 미지근하다. 이렇게 하면 욕실 상단의 작은 환기창, 아니 간이 창문이라고 불러도 될까—그 틈으로 새어드는 햇빛이 발가락 사이사이 막에 닿는다. 움직임이 컸던 탓에 욕조 안의 물이 한꺼번에 출렁인다. 수면이 기울어지며 가장자리를 넘고, 바닥으로 흘러내린다. 줄줄, 질척하게. 배수구 쪽으로 끌려가며 작은 소리를 낸다. 마치 무엇인가를 토해내는 것처럼. 흉포한 파도가 육지에 쏟아내는 잔해처럼. 적어도, 그녀가 보여준 영상 속에서는 그랬다.
나는 그 장면을 떠올리며 눈을 감는다. 물소리가 잠시 바다와 겹친다. 숨을 들이마시면 잠깐 짭짤한 냄새—이건 소독약과 녹슨 배관의 것이다—가 나는 것도 같다. 하지만 겹침은 오래가지 않는다. 다시 욕실이다. 다시 타일이다. 다시, 여기다.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
...좀 보내줘.
그리고 붙잡아 줬으면 해.
출시일 2026.01.09 / 수정일 2026.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