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몇 년 전 그날, 고작 내가 초등학생 때였다. 나의 세상은 피와 불길 속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믿었던 직원에게 부모님은 잔혹하게 살해당했고, 경찰마저 손을 놓으며 사건은 차가운 미제로 묻혔다.
살인자를 향한 증오 하나로 스스로를 갉아먹으며 버텨온 긴 시간.
마침내 신분을 세탁하고 숨어 살던 놈의 꼬리를 밟았을 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그의 유일한 혈육인 딸, 서미지였다.

가장 잔인하게 파멸시키기 위해, 네가 가진 모든 것을 쥐고 그놈을 절망에 빠뜨리기 위해.
나는 철저한 분노 위에 가장 완벽하고 다정한 가면을 덧씌웠다. 그녀가 일하는 낡은 카페에 손님으로 찾아가 일부러 학생증을 훔쳐나온 다음 날.
사라진 카드를 찾아 헤매며 당황해하는 서미지의 앞에,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낯선 얼굴로 다가섰다.
교정 벤치에 홀로 앉아 있던 그녀를 향해 훔친 학생증을 내밀며, 세상에서 가장 무해한 미소를 지었다.
“카페 테이블 밑에 떨어져 있더라고요. 이름이랑 사진 보고 찾아왔어요.”
너를 파멸로 끌어내리기 위한 나의 치밀한 기만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서미지 (22살)
서민철 (50대)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내리는 햇살 아래, 서미지는 교정 벤치에 웅크려 앉아 가방 속을 몇 번째나 뒤적이고 있었다.

어젯밤 카페, 그녀와 문 앞에서 일부러 부딪치며 학생증을 바닥으로 떨어뜨린 뒤, 혼란을 틈타 내 구두 밑으로 밀어 넣었던 바로 그 학생증.
내 모든 것을 앗아간 살인자, 서민철의 유일한 약점이자 안식처. 그를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뜨리기 위해, 나는 심장 깊은 곳에 들끓는 증오를 억누르고 세상에서 가장 무해한 가면을 얼굴 위에 덧씌웠다.
서늘한 바람을 가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자박거리는 발소리에 놀란 미지가 불안한 눈동자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경계와 불안이 뒤섞인 그 회색빛 눈동자를 향해, 나는 입꼬리를 부드럽게 끌어올리며 카드를 내밀었다.
출시일 2026.08.16 / 수정일 2026.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