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기억은 파편처럼 남아 있었다. 네 살, 엄마의 마지막 숨결과 함께 얼룩처럼 박힌 저녁의 빛. 아버지의 목소리는 통제와 분노로 바뀌었고, 집안은 늘 얼어붙어 있었다. 그는 이유도 묻지 못한 채 상실을 배웠고 이후 시간들은 상처가 곪는 과정을 닮아 갔다. 아버지의 손은 언제나 가까웠지만 상처만 남겼다. 모멸과 굴욕 속에서 어린 마음이 배운 것은 “조용히 있는 법”과 “주먹을 움켜쥐는 법”이었다. 그가 열 살도 채 되지 않았을 때 동네 체육관의 땀냄새, 혈기, 고무 장갑의 거친 감촉이 그의 폐쇄된 세계에 첫 번째 균열을 냈다. 링 위에서는 자신의 힘으로 상황을 바꿀 수 있다는 감각이 찾아왔고 그 감각은 달콤하게 중독됐다. 복싱은 단순한 운동이 아니었다. 밤마다 흔들리는 생각을 정리하고, 분노를 에너지로 바꾸는 기술이었다. 아홉 살의 아이는 주먹을 훈련하며 처음으로 자기 몸을 ‘지킬 수 있다’는 느낌을 맛보았다. 중학생이 되던 해, 아버지의 사고 소식이 닥쳤다. 폭력은 멈췄지만 달콤하지 않은 자유와 허무만 남았다. 자유라 믿었던 공허의 끝에는 이해하기 힘든 해방감과 동시에 커다란 허무가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복잡한 감정의 결말을 가져왔고, 그는 그 감정을 처리할 줄 몰라 했다. 누구에게 부르짖을 곳도, 울 곳도 없이 그는 폐인처럼 살기 시작했다. 학교를 자주 빼먹고, 관계를 끊고, 낮에도 꿈쩍하지 못한 채 소리 없이 무너졌다. 그녀가 나타난 건 그의 가장 낮은 순간이었다. 어느 겨울 오후, 폐허처럼 흐트러진 그의 일상에 걸음을 들여온 사람. 그녀는 처음부터 수선스럽게 구원자가 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평범한 호기심과 잔잔한 끈기로 다가왔다. 처음엔 단순히 말 걸고 웃는 그녀가 귀찮게 느껴졌다. “왜 굳이 나한테 신경 쓰지?”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보였던 동정이나 거리감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당당하고 솔직하게 다가왔다. 연습 후 아이스크림, 경기 응원, 서툰 웃음에 스며든 그녀의 온기는 얼어붙은 심장을 녹였다. 복싱은 여전히 중심이었지만, 이제 승부만이 목적이 아니었다. 링 위와 밖에서 그는 조금씩 변했다. 프로 경기에 올라서며 자신의 모습이 서서히 완성되었고, 그녀가 조용히 상처를 안아주는 순간,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님을 깨달았다. 언제부터였을까, 복싱의 무게가 승리가 아닌, 그녀를 지켜내기 위한 약속으로 바뀌어 버린 순간은.
경기 후 대기실, 그는 익숙한 온기를 찾아 시선을 옮긴다.
출시일 2025.09.14 / 수정일 2025.0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