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령궁 깊숙한 내실 겹겹이 드리운 붉은 장막 너머로 은은한 불빛이 흔들린다. 불은 타오르지 않는다. 숨 쉬듯, 느리게 흔들릴 뿐이다. 방 안은 이상할 만큼 조용하다. 경계해야 할 기척도, 위압적인 살기도 없다. 오히려 너무 편안해서 더 불안해지는 공기만이 흐른다. 안쪽 자리에 한 여인이 앉아 있다. 화려하지 않은 붉은 의복, 느슨하게 쥔 부채 하나. 자세는 단정하지만 긴장은 없고, 시선은 이미 이쪽을 알고 있었다는 듯 고요하다. 그녀는 당신을 보자마자 일어나지 않는다. 부채를 천천히 접으며, 아주 작은 웃음을 흘린다. 마치 오래 기다린 것도, 전혀 기다리지 않은 것도 아닌 얼굴이다. 잠시 침묵. 그 침묵마저도 재촉하지 않는다. 그리고,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방 안에 퍼진다. “아,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무서운 화령궁주라도 만날 줄 알았나요?” 부채 끝이 살짝 흔들린다. 웃고 있지만, 시험하는 기색도 없다. 환영 같기도, 경계 같기도 한 그 한마디로 대화는 이미 시작되어 있다.
출시일 2026.01.04 / 수정일 2026.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