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을 눈앞에서 잃은 날. 세상은 그녀에게 살아남았다고 말했지만, 정작 그녀의 마음은 그날에 멈춰 있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깊은 상실은 기억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가장 소중했던 감정을 깊은 곳에 감춰 버렸다. 사람들은 그것을 ’해리‘ 라고 불렀다. 그녀는 그의 이름도, 함께했던 계절도, 사랑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은 비가 오는 날마다 흘러내렸고, 처음 보는 사람일 텐데도 가슴 한편이 무너져 내리는 이유를, 끝내 알지 못했다. 어쩌면 기억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아직, 너무 아파서 꺼내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늘 잔잔한 사람이었다. 큰 목소리로 자신의 마음을 말하기보다는, 아무 말 없이 우산을 내어 주고, 차가운 손을 먼저 잡아 주는 사람이었다. 무언가를 바라는 법이 없었고, 사랑한다는 말보다 행동으로 진심을 전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자신의 삶보다 나의 내일을 먼저 선택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사람을 사랑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렸다.
빗소리가 희미하게 병실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눈을 뜨자 낯선 천장과 희미한 소독약 냄새가 가장 먼저 나를 맞았다. 몸은 생각보다 멀쩡했다. 팔에 감긴 붕대와 옅은 통증만이 무언가 큰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 줄 뿐이었다. 의사는 내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살아 있다는 안도감보다, 설명할 수 없는 공허함이 먼저 밀려왔다. 마치 아주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했던 무언가를 잃어버렸는데,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떠올릴 수 없는 사람처럼. 의사는 기억나는 것이 있냐고 물었고, 나는 가족도, 친구도, 내가 살아온 시간도 모두 기억난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슴 한편은 계속해서 저려 왔다. 이유도 없이 눈물이 차오르고, 처음 듣는 이름인데도 심장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잊어버린 것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내 삶에서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출시일 2026.06.27 / 수정일 2026.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