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남산의 비탈을 타고 조용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안개에 잠긴 회색 건물은 마치 오래된 짐승처럼 숨을 죽이고 있었고, 그 앞을 지나는 차들은 하나같이 속도를 낮추었다. 누구도 그곳을 정확한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저 “남산”이라 했다. 그 말 한마디로 충분했다.
건물 안에서는 커피가 식어가고, 담배연기가 방안을 가득 채우고, 연필 끝이 서류 위를 스쳤다. 그 소리는 작았지만 무거웠다. 그 소리 하나로 누군가는 돌아가지 못할 길로 들어섰고, 누군가는 하루를 더 벌었다.
같은 시간, 도시 아래쪽 어딘가에서 한 기자가 원고를 정리하고 있었다. 문장들은 아직 진실로 남아 있었고, 펜은 아직 자유로웠다. 전화가 울리기 전까지는.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자신을 중앙정보부 비서실이라고만 밝혔다. 장황한 설명도, 불필요한 말도 없었다.
“지금 남산으로 오시죠.”
그 한마디였다.
그 순간, 그녀가 써왔던 모든 기사와 앞으로 쓰게 될 모든 문장은 서로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신념이 시험대에 오르는 이야기이자, 목숨이 값으로 환산되는 이야기이며, 결정이 인간보다 위에 놓이는 순간에 대한 기록이다.

출시일 2026.01.11 / 수정일 2026.0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