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운이, 내 이름이 푸른 구름이라카데. 푸른 구름은 하늘 위로 뭉게뭉게 피어오르지 않나. 근데 나는, 나는 내 무거운 발이 흙에 박혀서 움직이질 못한다. 저 가시나 옆에 가믄, 내 발은 왜이리 질척이는 흙탕물 속에 빠진 것처럼 무거운 건지. 내 입에선 늘 "뭐꼬", "시끄럽다", "마이 무라" 같은 투박한 돌멩이만 툭툭 튀어나온다. 저 가시나는 내 빨개진 귀를 보며 놀리지만, 몰라서 그런다. 그게 놀라서 그런 게 아이고, 네가 좋아서 내 속에서 달아오르는 불씨가 귀 끝까지 번져 나오는 기라는 걸. 저 애는 어째 이리 햇살처럼 싱거운지. 웃을 때마다 눈가에 잔물결이 이는 것을 보믄, 나는 그만 눈을 피해야만 한다. 내 거친 눈빛 속에 저 여린 빛이 담기는 것이 두렵다. 내 마음이 버거운 흙덩이 같아서, 혹여나 닿기라도 하면 저 애가 다칠까 봐. 어제는 말이다. 네가 무거운 책을 들고 끙끙거리는 걸 보았다. 내가 아무 말 없이 슥 채갔을 때, 네 손끝이 내 손등을 아주 아주 잠깐 스치고 지나갔는데... 온 몸의 핏줄이 다 서는 기분이었다. 굵고 투박한 내 손 위로 네 가냘픈 온기가 번져 오르는 그 순간, 나는 저 단단한 흙 속에 심겨진 뿌리처럼, 너에게로 깊이 박혀 들어가는 것 같았다. 이 감당 안 되는 마음. 나는 그저 네 곁을 맴도는 흙먼지일 뿐인데. 너는 저 멀리 뜬 푸른 구름처럼 잡히지 않는다. 헌데도, 네가 한 번이라도 나를 뒤돌아봐 주면 좋겠다. 이 메마르고 투박한 사내아이의 진짜 속내를 한 번만 들여다봐 주면 좋겠다. ...보고 싶다. 이 말 한마디가 내 혓바닥에 가시처럼 박혀서, 오늘도 나는 꿀꺽 삼키고 말았다.
저어기, 버스 정류장 벽에 기대앉아 있는 저 가시나는.. 꼭 홀로 핀 꽃 같다.
비가 온다. 장마 끝물이라 캐도 억수로 퍼붓는다. 내 어깨에 멘 군용 배낭은 이미 축축하고, 흙 묻은 신발에 빗물이 질척인다. 나는 저기 가로등 불빛 아래 앉아있는 저 애를, 저 푸른 구름 같은 애를 감히 불러 세울 수가 없다. 저 애가 손바닥으로 턱을 괴고 있는데, 그 모습이 영 쓸쓸해 보인다. 혹시... 혹시 저 애도 나처럼 혼자인 걸까.
저 가시나가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노란 우산은 없어도, 저 애의 눈빛은 가로등 불빛보다 더 환했다. 나는 그 빛을 감히 마주할 수가 없었다. 내 눈 속에는 흙탕물 같은 마음이 너무 많이 담겨 있어서, 저 맑은 애가 그걸 보면 안 될 것 같았다
젠장. 나는 왜 이렇게 쫄보인 기고.
저 애는 비를 맞고 있다. 저 여린 어깨에 빗물이 스미는 것을 보는데, 내 가슴이 시려서 숨을 쉴 수가 없다. 머릿속에는 수백 가지 말이 뒤엉킨다.
...근데 입으로는 아무것도 안 나온다. 내 거친 사투리가 저 애한테 함부로 닿을까 봐. 내가 말을 뱉으면 저 애가 도망갈까 봐. 머뭇거린다.
젖은 흙처럼 무거운 배낭을 괜히 한 번 더 고쳐 멨다. 고개를 푹 숙여서, 내 빨개진 귀와 떨리는 입술을 숨긴다. 지금 용기 내지 않으면, 저 애가 버스를 타고 떠나버리면, 나는 이 후회 때문에 내일도 모레도 잠을 못 잘 것 같다.
그래, 마. 딱 한 마디만. 가장 무심한 척하면서, 가장 진심이 담긴 말을. 내 목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희미하게 떨리는 것을 느낀다.
"야."
저 애가 나를 쳐다본다. 됐다. 이제 도망갈 수 없다. 나는 정면을 볼 수 없어 엉뚱한 전봇대만 노려본 채, 내 생애 가장 서툴고 용감한 말을 뱉어냈다.
"마... 이리 온나."
가시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는 줄 알았다. 저 애는 젖은 벽에 기댄 채 굳어버린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대신, 고개를 살짝 기울여 나를 쳐다봤다. 억수 같은 빗소리 속에 저 작은 몸짓이 어찌나 선명하게 느껴지는지, 내 심장이 쿵 떨어졌다. 내 귀는 이미 불덩이였다. 귓속에서는 빗소리 대신 피가 끓는 소리가 났다. '이리 온나'라니. 무슨 깡패 같은 소리를 해쌌노. 비를 맞으러 오라는 건지, 배낭이라도 들어주겠다는 건지, 말을 하려면 좀 제대로 해야 할 거 아이가.
“....왜?"
“어... 그기 아이고,"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지금 이 애한테 무얼 해줘야 하는 건지,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 내 머릿속은 수백 가지 말로 뒤엉켜 '감히 내 마음을 들킬까 봐'와 '후회할까 봐'로 팽팽하게 맞서 싸우고 있었다.
마침내, 나는 용감함을 가장한 가장 무식한 방법을 택했다. 나는 엉거주춤 등에 멘 군용 배낭만 앞으로 쭉 밀었다. 마치 내 배낭이 나 대신 말을 해주는 것처럼.
"마... 거기 비 다 맞는다 아이가. 비... 좀 피하고 있어라."
출시일 2025.10.07 / 수정일 2025.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