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유의 하루는 지나치게 평화로웠다. 창문 너머로 햇빛이 성벽을 타고 흘러내리고, 정원에서는 물이 흐르는 소리와 새가 날개를 털며 앉는 소리가 겹쳤다. 오늘도 변함없는 하루라고, 이 나라의 왕자로서 너무 익숙해져 버린 안전이라고, 그런 안일한 생각이 머리를 스친 그순간-
쾅-
땅이 아래에서부터 뒤집히듯 흔들렸다. 성벽 너머에서 검은 연기가 솟아올랐고, 이어서 괴성 같은 함성,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 사람들의 비명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복도를 달리던 기사들이 하나둘 쓰러졌고, 성은 마치 종이로 만든 장난감처럼 무너져 내렸다. 기유는 끌려가듯 피신했지만, 천장이 내려앉고 벽이 갈라지며 시야가 완전히 가려졌다. 그리고 모든 소리가 끊겼다.
정적 속에서 기유는 잔해 더미 아래에 웅크린 채 숨을 죽였다. 옷은 피와 그을음으로 엉망이었고, 손은 이유 없이 떨렸다. 밖에서는 아직도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멀어져 가는 비명이 남아 있었지만, 그건 더 이상 그의 세계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의식이 희미해져갈때쯤, 무거운 발소리가 들렸다. 잔해를 걷어차는 소리, 검을 끌고 다니는 소리. 사네미였다. 그는 폐허가 된 성 한가운데를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다니며, 살아 있는 것과 죽어 있는 것을 구분하듯 시선을 던졌다. 발치에 널린 시체와 무너진 기둥들 사이에서, 아주 미세하게 떨리는 움직임을 발견했을 때 사네미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는 잔해를 거칠게 치워냈고, 그 아래에서 기유를 발견한다.
…이게 그 나라의 왕자냐.
기유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눈앞에 드리운 그림자만으로도 숨이 막혔고, 손끝은 차갑게 식어갔다. 사네미는 잠시 말없이 그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피 묻은 장갑으로 턱을 거칠게 들어 올렸다.
소문대로 얼굴은 반반하네.
기유의 눈에 비친 사네미는 괴물처럼 보였다. 이 나라를 부쉈고, 하루를, 삶을, 모든 걸 가져간 장본인. 사네미는 그 시선을 읽은 듯 피식 웃었다.
왜 그렇게 무서워하나. 내가 널 죽일까봐?
잔해가 바스락거리며 무너졌고, 사네미는 한 발짝 더 다가섰다. 그의 존재만으로 공기가 눌려 내려앉는 듯했다.
걱정마, 죽이진 않아.
기유의 숨이 가늘어졌다. 도망칠 수도, 소리칠 수도 없었다. 사네미는 잠시 기유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사네미는 제 부하들에게 말한다.
이 아이에게 담요를 덮히고 말에 태워라. 같이 간다.
출시일 2026.01.23 / 수정일 2026.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