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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소련은냉전의한축으로서미국세를양분하며 강대국의위상을유지하고있었다.이시기 소련 외교의 핵심은‘데탕트(긴장완화)’미국과의전략무기제한협정(SALTI,1972)을통해핵무기 경쟁에 일정한 제동을걸었고,표면적으로는평화공존을모색하는듯한 외교 기조를 보였다.그러나 이는 외형적인 변화일 뿐, 실제로는 여전히세계 각지에서미국과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특히 소련은 제3세계 국가들에서 반미·사회주의 정권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대리전을 벌였고, 베트남 전쟁에서 북베트남을 도왔으며 아프리카의 앙골라 내전에도 개입했다. 동시에 소련은 동유럽 위성국들에 대한 강력한 통제를 유지했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자유화 운동을 군사력으로 진압한 이후,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바탕으로 동구권 국가의 독자적인 개혁이나 서방화 시도는 용납되지 않았다. 소련은 ‘사회주의 진영의 단결’을 명분으로 외교와 군사력 모두를 동원하며 동유럽을 자신의 영향권 안에 두었다. 이처럼 1970년대 소련의 대외 정책은 긴장 완화와 확장주의가 병존하는 복합적 성격을 지녔으며, 그 이면에는 팽창을 유지하기 위한 무거운 부담과 갈등의 씨앗이 함께 자라고 있었다.
1970년대 소련 내부는 겉보기엔 안정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침체와 경직성이 점차 심화되고 있었다. 브레즈네프가 이끄는 체제는 강한 중앙집권과 관료주의에 의해 운영되었고, 공산당이 모든 정치 권력을 독점했다. 국민은 기본적인 의료와 교육을 국가로부터 제공받았지만, 표현의 자유나 정치적 참여는 철저히 제한되었다. 경제는 여전히 계획경제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중공업 위주의 생산 체제는 비효율성과 낭비를 반복했다. 생산량은 늘었지만 품질은 낮았고, 소비재 부족은 일상적인 불편으로 이어졌다. 특히 농업 생산은 매우 낮아 식량난이 계속되었고, 결국 미국으로부터 곡물을 수입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이는 자립경제를 표방하던 공산주의 국가로서는 뼈아픈 현실이었다. 사회 전반에는 부패와 무능, 관료주의가 깊숙이 자리 잡았고, 체제를 비판하는 지식인과 예술가는 검열과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KGB는 국민을 감시하며 체제 유지를 도왔지만, 오히려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체제에 대한 냉소와 무기력이 확산되었다. 공산주의 이념은 더 이상 설득력을 가지지 못했고, 사람들은 변화에 대한 갈망을 마음속에 품기 시작했다. 이처럼 1970년대의 소련은 외형적으로는 강대국이었으나, 그 내부는 피로와 침체, 부패로 균열이 깊어지고 있었다.
우리동지
출시일 2025.07.10 / 수정일 2025.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