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밤은 늘 축축했다. 벽돌 담장 사이로 스며드는 안개와 오래된 쓰레기의 냄새가 골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무진은 그 속에 서 있었다. 재킷 주머니에는 아직 따뜻한 지폐 뭉치가 들어 있다. 몇 분 전, 그는 보스가 시킨 대로 거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손끝에는 아직 꺼림칙한 냄새가 남아 있다. 지폐의 냄새인지, 손을 쥐던 남자의 땀 냄새인지, 아니면 창고 안에 가득 퍼진 싸구려 담배 연기인지 알 수 없었다.
It's done. 다 끝냈습니다.
무진은 전화기 너머로 짧게 보고를 했다.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안쪽에서는 늘어선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전화가 끊기자, 골목은 다시 조용해졌다. 늦은 밤 런던의 공기는 이상하게 무겁다. 그 무게 속에서 무진은 벽에 등을 기대고, 어둠에 잠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붉게 비치는 가로등 불빛이 그의 얼굴을 반쯤만 드러냈다.
그는 언제나 이렇게 남겨진다. 조직원들과 함께 있을 때는 짐짝처럼 부려먹히고, 일이 끝나면 홀로 골목에 버려진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그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개’로만 존재한다.
무진은 아직 골목 모퉁이에 서 있었다. 숨이 조금 가빴지만, 표정은 담담했다.
가로등 불빛이 일렁이며 그의 얼굴선을 따라 흘러내렸다. 마른 어깨와 부슬부슬한 검은 머리칼, 여우처럼 찢어진 커다란 눈매. 그 모습이 이곳의 그들에게는 불편한 진실이었을까.
Hey, kid. Done with the boss’s errands again? 야, 꼬맹이. 또 보스 심부름 다 했냐?
담배를 문 조직원이 느릿하게 다가왔다. 다들 나이를 지긋하게 드신 것들이다. 무진은 눈을 피하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Yes. Got it all done. 네. 다 끝냈습니다.
그 담백한 대답에, 뒤따라온 또 다른 조직원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What’s this puny kid even good for that the boss dotes on him? Back in our day, blood had to spill, bones had to break. 이 약한 꼬마가 대체 뭘 잘한다고 보스가 그렇게 아낀대? 우리 땐 피가 튀기고 뼈가 부러져라 일했다니까.
Right? Look at his hands. Soft as a kitten, not a hunting dog, no chance. 그렇지? 이 녀석은 손도 곱잖아. 애완견이지, 사냥개가 아냐.
낄낄대며 담뱃재를 털어내는 손길이 무진의 어깨를 툭툭 쳤다.
무진은 눈을 내리깔고 묵묵히 버텼다. 싸우지도 않고, 반항하지도 않고. 보스 앞에서는 아무도 그를 건드리지 못했으니, 그들은 좁은 골목에서 늘 본성을 드러냈다.
한 명이 손을 뻗어 무진의 옷깃을 낚아채려는 순간, 그의 눈빛이 번뜩였다.
…I still have to take it to the boss myself. 아직, 보스한테 직접 갖다 드려야 합니다.
순간 골목에 정적이 흘렀다. 조직원들의 심기를 건드린 걸까.
Damn, showing off… tiny Asian brat. 젠장, 잘난 척은. 이 조그만 동양애 같으니라고.
Hey, kid.
건물을 빠져나오자, 누군가 무진을 불러 세웠다. 조직원이었다. 무진은 서늘하게 죽은 눈으로 그를 응시한다.
그는 껄렁한 태도로 무진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This time, there's some Trouble brewing in Bermondsey. The big man wants you to go there right away. 버몬세이 쪽에 문제가 좀 생겼어. 보스가 바로 너를 보내라고 하시더라.
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직에서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저 순종이었다. 의문이나 반항은 허용되지 않는다.
조직원은 그런 무진을 힐끗 쳐다보더니,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Aye, that's all. Oh, but keep in mind that this time there's a bit of unpredictability involved. 그게 다야. 아, 그런데 이번엔 조금 변수가 있을 수 있어.
변수라는 말에 무진의 신경이 곤두섰다. 조직의 일에서 변수는 언제나 피를 의미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런 무진의 반응에 익숙한 듯 피식 웃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Well, good luck, boy. You'll do fine. 행운을 빌어, 꼬마. 넌 잘 해낼 거야.
버몬세이에 도착하니, 거리부터가 달랐다. 코를 찌르는 공기, 음습한 안개,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뚫고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까지. 무진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골목 곳곳에 위치한 허름한 술집들에서 사람들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하나같이 술에 취해 붉어진 얼굴로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무진은 그 모습을 무감정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도착한 곳은 버몬세이의 한 술집. 겉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술집이었지만, 무진은 알고 있었다. 이곳이 조직의 런던 북부 지역 거점 중 하나라는 것을.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시끄러운 소음이 그를 맞이했다.
안에는 이미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서로 소리를 지르며 싸우기도, 웃고 떠들며 춤을 추기도 했다. 그 혼란스러운 광경 속에서, 한 남자가 무진을 발견하고 알은체를 했다.
Oh, you're that kid again? Weren't you in Lambeth last time I heard from the boss? 또 너냐? 보스가 저번엔 램지프에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여기까진 무슨 일이야?
무진은 남자의 조롱 섞인 말을 무시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낯익은 얼굴들이 몇 보였다. 조직의 일원들이었다.
남자는 무진이 자신의 말에 대답하지 않자 인상을 찌푸리며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Ignore me, boy? 날 무시해?
무진이 여전히 반응이 없자, 남자는 그를 밀치려 했다. You little…! 하지만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술집 가장 안쪽, VIP실에서 나온 보스가 무진을 발견하고는 이쪽으로 다가왔다. 보스의 등장에 남자는 급히 뒤로 물러났다. 보스는 그런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무진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무진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 안으며 말했다. 겉모습은 다정하지만, 그 속에 숨겨진 칼날을 무진은 잘 알고 있다.
You're here because there's trouble. That's all you need to know. 네가 여기 온 건 문제가 있어서야. 넌 그거만 알면 돼.
보스가 가리킨 문을 열자마자 보인 것은 난장판이 된 곳에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진 사람들, 그리고 한가운데서 미친 듯이 웃고 있는 남자였다.
그는 온통 피범벅이 된 채, 손에 흉기를 든 채 웃고 있었다.
그가 무진을 발견하고는 말했다. Oh, it's you, wasp. 아, 너였구나, 제비.
출시일 2025.09.13 / 수정일 2025.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