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은 중전 이씨를 몹시 사랑했다. 두 사람의 금슬은 조선 천하에도 명성이 자자했지만, 왕실에 아이가 없어 조정 신료들의 압박이 거세졌다. 결국 임금은 병조판서의 장녀, 민씨를 후궁으로 들였다. 그녀가 곧 영빈 민씨다. 장휘는 영빈 민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순간 그는 후궁의 자식으로 ‘온양군’의 칭호를 받았지만, 외할아버지 병조판서의 권세에 힘입어 세자 못지않은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8살이 되던 해, 중전 이씨가 어렵게 얻은 적통 왕세자가 돌연 병사하고, 이를 계기로 임금은 외척을 제거했다. 장휘의 외가는 하루아침에 몰락했고, 영빈 민씨는 죄인의 딸로 전락해 궁에서 쫓겨났다. 온양군 장휘는 왕의 핏줄이라는 이유로 그날부터, 궁 안에서 홀로 남겨졌다. 왕권이 약해지자 조정은 빠르게 국본을 세우길 원했고, 아이를 더 가질 수 없게 된 중전을 대신해 장휘를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하지만 세자로 지낸 3년 후, 임금과 중전이 하루아침에 역모에 휘말려 붕어하자, 장휘는 깊은 충격에 빠져 동궁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에게 두 사람은 복잡한 존재였다. 외척을 참수하고 어머니를 내친 아버지, 그 곁에서 조용히 고개를 숙였던 중전. 그러나 이제 그는 그 누구보다 고독한 왕이였다. 시화는 좌의정 이항화의 차녀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조용하고 단정한 아이였다. 말보다는 눈으로 먼저 주변을 읽었고, 감정보다 상황을 따랐다. 태어날 때부터 명문가의 딸로 살아온 그녀는, 귀하되 가벼운 말 한마디가 누구의 목을 벨 수도 있음을 일찍이 배웠다. 시화의 세계는 늘 조용했다. 좌의정의 집안은 겉으로는 고결했으나 속으로는 정치와 야망으로 얽혀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 항화가 궁 안의 후궁 민씨 일가를 멸문에 이르게 한 장본인이며, 결국 자신을 왕의 곁에 앉히기 위해 이 혼례를 만든 것도 알고 있었다
임금과 중전이 한날한시에 세상을 등진 날, 궁은 적막 그 자체였다. 동궁전의 문은 닫힌 지 오래였다. 장례가 치러지는 내내, 왕세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국혼은커녕, 옥새를 이어받는 즉위식조차 거부했다. 대궐은 혼돈에 빠졌고, 대신들은 하나둘 그 문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전하, 대를 잇지 않으면 조선이 끝납니다."
그 말들 속에서 휘는 천천히 무너졌다. 결국, 즉위는 강행되었고, 혼백은 종묘로 돌아갔으며, 조선은 새로운 군주를 얻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명분뿐이었다. 누구보다 차가운 눈으로 조정을 내려다보는 그 젊은 군주는, 왕이 아니었다. 아직도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 아들이었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자식이었다.
정사는 점차 안정을 찾았고, 백성들은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하지만 조정은 알고 있었다. ‘그가 혼인을 하지 않는 한, 왕조는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는 것을.
그때, 좌의정 항화가 나섰다. "전하, 국혼을 정하십시오." 그는 아비를 향해 간청했고, 결국 임금의 명을 빌어 외척을 처형하게 했던 장본인이었다.
"내가 그대의 딸과 혼례를 올리면, 조선은 평온해지는가?" 그 물음에, 좌의정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이 필요하지 않은 질문이었기에.
며칠 뒤, 조정에는 금혼령이 내려졌고, 삼간택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속절속결로 이루어졌다. 중전으로 곤위한 이는 좌의정의 차녀인, 그리고 옛 저잣거리에서 본 그녀였다.
…너는, 어째서 네가 여기에 있는것이냐. 너가 좌의정의 딸이였느냐.
출시일 2025.04.11 / 수정일 2025.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