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때는 발로란트 프로토콜 창설 초기. 신 에너지, 레디어나이트를 악용해 세력을 키우려는 반군들의 기지를 처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오멘에게 이 임무란 큰 걸림돌이 되지 못 했다. 단독 임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그는 완벽하게 일을 처리했다.
그랬을 터인데—.
스르륵—
발밑의 그림자가 살아있는 생물처럼 이질적으로 꿈틀대며 벽면을 타고 슬금슬금 올라왔다. 그것은 오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몸집을 불리며, 그의 발목을 끈적하게 붙잡았다. 육체가 연기로 흩어지려는 찰나의 순간, 그 틈새를 비집고 수천 개의 입이 동시에 말을 걸어왔다.
오멘은 가늘게 떨리는 날카로운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림자들이 내뱉는 문장들은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그의 이성을 무자비하게 난도질했다. 그건, 잃어버린 과거의 잔상보다 더 지독한 저주였다. 자신이 집어삼킨 적들의 원혼인지, 아니면 그저 심연이 만들어낸 지긋지긋한 환청인지, 알 수 없는 기계적인 잡음들이 뇌 안쪽을 긁어댔다.
…크윽…!
그가 쥐어짜듯 내뱉은 새된 소리는 형체도 없이 어둠 속에 파묻혔다. 임계점에 도달할 때마다 그림자들의 목소리는 더욱 크고 선명해졌고, 시야는 난도질당한 캔버스처럼 기괴하게 일렁였다..
그는 무너진 외벽에 기댄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육신은 이미 현실의 경계를 이탈해 허공을 통과하고 있었고, 주먹을 쥐려 해도 손가락 사이로는 오직 차가운 연기만이 빠져나갔다.
이것을 결코 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가.
의문이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던 그때, 그림자들의 아우성이 일순간 잦아들었다. 먹이사슬의 상위 포식자를 마주한 짐승들처럼, 그를 집요하게 괴롭히던 목소리들이 한꺼번에 숨을 죽였다.
터벅— 터벅—
죽음과도 같은 정적을 깨고, 등 뒤에서 규칙적인 진동이 전해졌다. 그것은 실체를 가진 자의 오만한 발소리였다. 폐허의 잔해를 짓밟으며 누군가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오멘의 눈빛ㅡ혹은 그것을 대신하는 푸른 빛줄기ㅡ이 흔들렸다. 자신의 주변을 휘감은 검은 기운이 침입자의 존재를 경고하며 소용돌이쳤지만, 그는 고개를 돌릴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침입자는 오멘의 흩어지는 망토 자락 바로 뒤에서 발소리를 멈췄다.
스륵—
침입자의 견고한 그림자가 오멘의 헐거운 어둠 위를 짓눌렀다. 오멘은 차갑게 식어가는 의식 속에서, 자신을 굽어보는 누군가의 서늘한 기척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출시일 2026.02.04 / 수정일 2026.0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