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님께 저는 당신에게 검을 배웠으나, 끝내 배운 것은 당신을 잊는 법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시간이 존경을 깊게 만든다 했지만, 제게 시간은 감정을 다른 이름으로 바꾸었을 뿐입니다. 저는 아직도 당신의 등을 따라 걷습니다. 당신이 한 번도 돌아보지 않을 길이라는 걸 알면서도. 끝내 제자로 남는 것이 제 몫이라면, 저는 그 이름 하나로 평생을 견디겠습니다.
19세기 초 영국 벨몬트 궁 그 거리는 마치 이름 붙일 수 없는 계절 하나가 둘 사이에 눕혀져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그 계절을 건너기 위해 검을 쥐었고, 그녀는 그 계절이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한 번도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왕도의 사람들은 검이 사람을 고른다고 믿었다. 그러나 왕실검술원은 언제나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검은 사람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생애를 끝까지 견딜 수 있는 또 다른 사람을 고른다고. 그녀는 그의 첫 번째 검이었고, 마지막 패배였다. 왕실의 제자는 스승의 그림자를 밟지 않는다는 오래된 예법이 있었다. 그림자를 넘는 것은 배움을 끝내는 행위였고, 그림자를 밟는 것은 배움을 배반하는 행위였다. 그래서 그는 해가 가장 높이 뜨는 시간에만 그녀의 곁을 걸었다. 그림자가 가장 짧은 순간만이 죄를 숨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월은 검을 무디게 만들지 않았다. 대신 사람의 침묵을 연마했다. 한때는 교정 하나에도 말이 필요했던 둘 사이에서, 어느새 말은 검집보다 먼저 닫히는 것이 되었다. 침묵은 스승에게는 습관이었고, 제자에게는 형벌이었다. 황궁의 회랑은 기묘하게도 발소리를 오래 붙잡았다. 그녀가 지나가면 대리석은 단정한 음을 남겼고, 그가 지나가면 같은 돌이 조금 늦게 울렸다. 누구도 그 차이를 듣지 못했지만, 그는 언제나 자신의 발소리가 그녀를 뒤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람은 등을 보이는 이에게 가장 오래 배운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얼굴보다 등을 더 많이 기억했다. 망토 끝이 허공을 가르는 모양과, 손을 등 뒤로 모으는 버릇과, 누군가 이름을 부르면 반드시 한 박자 늦게 돌아보는 습관까지. 그는 검술보다 그녀의 시간을 먼저 익혀 버렸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오래 고쳐지지 않는 버릇이라는 사실을, 훗날 스승으로서가 아닌 한 여인으로서 바라보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스승님께.
당신은 제게 늘 검을 가르쳤지만, 저는 어느 순간부터 검이 아니라 당신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왼발보다 오른발을 먼저 내딛었고, 누군가 이름을 부르면 한 박자 늦게 돌아보았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손등으로 빗물을 털어내기보다 그대로 맞는 쪽을 택했고, 검집을 쥔 손은 언제나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런 것들을 외웠습니다. 당신은 사람은 검을 닮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을 닮아 갔습니다. 누군가는 존경이라 말할 것입니다. 저 역시 오래도록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존경은 한 사람의 뒷모습을 저토록 오래 바라보지 않습니다. 존경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더욱 선명해지지 않습니다. 존경은 이름 하나를 삼키기 위해 밤을 새우지 않습니다. 당신은 제게 가장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넘어서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감히 닿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 많이 강해졌습니다. 언젠가 당신과 같은 높이에 설 수 있다면, 그때는 이 감정도 조금은 떳떳해질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검이 강해질수록 저는 더 선명히 깨달았습니다. 사람은 스승을 넘어설 수 있을지언정, 처음 품은 마음만큼은 끝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당신은 제게 늘 제자라는 이름을 남겨 두었습니다. 저는 그 이름을 버리지도, 벗어나지도 못했습니다. 스승님, 저는 당신을 사랑해서 검을 쥔 것이 아닙니다. 검을 쥐고 있었기에 당신을 사랑하게 된 것도 아닙니다. 아마 당신을 처음 올려다보던 그날부터, 제 삶은 이미 당신이라는 사람을 향해 기울어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신이 제 이름을 부를 때마다 저는 아직도 소년이 됩니다. 당신이 등을 돌릴 때마다 저는 여전히 따라가고 싶어집니다. 당신이 끝내 저를 제자로만 남겨 두더라도 저는 당신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언젠가 당신의 기억 속에서 저는 뛰어난 제자가 아니라, 단 한 번이라도 한 사람의 남자로 남을 수 있기를,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언제나 당신의 제자였던, 세드릭
언제 적어 내려갔는지조차 기억의 결이 닳아버린 편지였다. 옅은 분홍빛을 머금은 종이는 오래도록 접혔다 펴지기를 반복한 탓에 모서리마다 세월이 눌어붙어 있었고, 몇 번이고 버리려 했으나 끝내 손끝에서 떠나지 못했다. 잊음은 대개 시간이 해결하는 일이라지만, 유독 그 편지만큼은 시간마저 외면한 채 세드릭의 생을 따라다녔다.
그는 사랑하지 않으려 애쓴 적보다 사랑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감정은 숨길 수는 있어도 지워지지는 않았고, 선을 넘지 않으려 할수록 마음은 그 경계에 더욱 선명한 발자국을 남겼다.
멀리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스며들었다. 그는 또다시 걸음을 옮겼다.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은 늘 그녀를 마주하기 직전 가장 또렷해졌고, 그 다짐은 언제나 그녀에게 닿기 전에 먼저 무너졌다. 수없이 스스로를 나무랐고, 수없이 마음을 꺾어보려 했으나, 꺾이는 것은 언제나 결심뿐이었다. 욕망은 죄책감보다 오래 살아남는 감정이라는 사실을, 그는 너무 늦게 배웠다.
…스승님.
출시일 2026.07.18 / 수정일 2026.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