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 잠긴 듯, 귓가에 울리는 무거운 공기의 진동. 뿌연 시야 너머로 천천히 눈앞의 풍경이 비치기 시작하고, 의식이 점차 또렷해진다.
짙고 어두운 그레이 톤의 방. 이 작은방 안에서, 나를 에워싸고 선 5명의 사람... 내게 적의를 가진 듯 모두 차가운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 해보지만... 어째선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살펴보니, 두 팔은 물론이고 전신이 의자에 구속되어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황임을 발견한다.
무어라 대화를 시도하기도 전에, 거칠고 투박한 손길이 제 얼굴을 잡아 돌린다. 강제로 마주한 남성의 얼굴은 경계심이 가득하고, 뼈가 시릴 정도로 서늘한 표정이다.
...쥐새끼처럼, 잘도 우리 전함에 숨어들었던데.
...이거, 뭔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
잠입했을 당시에만 해도, 모든 게 순탄히 흘러갈 줄 알았다. 카엘룸의 최신 경비 시스템은 물론이고, 먼지 한 톨 움직이지 않고 내부에 성공적으로 숨어들어왔으니까.
헌데, 정신을 차려보니 지금 이 상황이라니, 어떻게 하지? 최대한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면, 어떤 신분과 어떤 거짓말을...
...저는, 그냥 평범한...
...마침 잘 됐어. 우리도 '칼리고' 에 대한 정보 부족으로 골머리를 앓던 중이었거든.
차갑고 날카로운 시선. 곧 서늘한 미소가 그의 얼굴에 얕게 내려앉는다.
순간 불안감이 엄습하고, 등에 식은땀이 서린다. 이대로 임무에 실패할 순 없어. 어떻게든 변명을...!
자, 잠깐만요! 저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
다급히 입을 여는 순간...
그는 당신이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성큼 다가와 어깨를 강하게 잡아누른다. 나머지 4명도 긴장한 듯 당신을 주시한다.
그만, 그건 우리가 판단할 일이야. 너는 그냥 우리가 묻는 말에 대답이나 잘 하면 돼.
날카로운 눈빛으로 살펴보는 눈앞의 남성. 경계심이 가득하면서도, 어딘가 의아하다는 느낌이다.
...이런 착장으로 전함 잠입이라니, 도무지 직업의식이 투철하다고 보기는 어렵겠는데.
얼굴을 잡고 있던 손이 천천히 목덜미로 내려온다. 곧, 목에 걸려있던 작은 로켓 목걸이를 손에 굴리기 시작한다.
...아뿔싸. 단순 호기심에 구경삼아 들어와 봤을 뿐인데, 상황이 어떻게 되어버린 거지? 괜히 아빠 따라 구경나오는 게 아니었는데...
어색하게나마 미소 지으며, 조심히 입을 열어본다.
죄송해요. 우주 전함은 처음 봐서, 구경하고 싶은 마음에 무심코 들어와 버렸어요. 마침 근처에 아무도 없길래...
경계심 서린 의아한 눈빛의 남성은, 곧 내 주머니에서 카드 한 장을 찾아낸다. 차가운 금속 재질의 '군부 방문 허가증'을 확인한 그는, 조금 부드러운 눈빛으로 다시금 날 바라본다.
...아, 제독님 자제분이셨군요. 허가증을 이렇게 아무렇게나...
곧 의자의 구속 장치가 해제되고, 직접 내 가슴께에 허가증을 달아주며 말을 이어간다.
허가증의 경우, 명찰과 같이 흉부 상단에 고정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이렇게...
손을 거두고, 정갈한 움직임으로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남성. 방금의 날카로운 어투와 비교되는, 차분하고 부드러운, 듣기 좋은 목소리다.
대응이 다소 부적절했던 점 사과드리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상시 경계를 늦출 수 없는 입장이라서요.
당장이라도 자택 앞에 데려다 드리고 싶습니다만, 한 번 이륙한 이상 최소 1달 이상의 항행이 이어지는지라...
주변의 넷 또한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가 싶더니, 곤란한 눈빛으로 서로 시선을 교환한다.
일단 본부에 연락해두도록 하겠습니다. 사랑스러운 딸이 하루아침에 실종되어 버리면, 제독님께서도 곤란하실 테니까요.
그는 잠시 말없이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덧붙인다.
관람이 목적이셨다면... 제가 직접 전함 내부의 주요 시설을 소개드려도 될까요?
전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칼리고는 뭐고, 우주 평화는 또 어쨌고...
...그러니까, 그만 이 의자에서 풀어줄래요? 팔이랑 다리가 쑤시고 난리도 아니라구요.
남색 머리카락의 남성이 가만 날 내려다보더니, 곧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다. 뒤의 넷을 향해 눈짓을 하는가 싶더니...
곧 분홍색 머리카락의 남성이 다가와선, 의자를 조작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내 전신, 손목과 팔다리를 죄이던 장치들이 빠르게 해제되기 시작한다.
조심히 손목을 쓰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철컥-' 작은 전자식 결합 소리와 함께 손목에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닿아온다. 뭐야, 이게... 수갑!?
...이봐요! 수갑까지 채울 일은 아니지 않나요!?
그가 차가운 눈빛과 함께 내 팔을 단단히 쥐어잡는다.
안 돼. 네 신원을 명확히 하지 못하는 한, 우리 입장에선 이 정도가 네게 제공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자유야.
출시일 2025.07.21 / 수정일 2025.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