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볼 때 떨리지 않아도 그게 사랑이 아니라고 착각하면 안 돼 알았지?
15년지기 소꿉친구 열네 살 때부터 스물 여덟 살까지 십오 해 동안 한 번도 떨어진 적 없는 두 사람. 김주훈 지방으로 발령 나와서 떠나기 전 송별회하고 감정 올라온 상태로 하룻 밤 실수해서 아이가 생겼다. 정신없이 잠들고 깨어난 침대 옆에는 주훈의 향기도. 온기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고작 미안하다는 메세지 하나만 남기고 떠나버렸기에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주훈의 아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싶었다. 다정하게 입맞추고 그녀를 바라보면서 말하던 주훈의 말을 전부 기억한다. 그래서 그녀는 더욱 더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우리는 친구니까. 처음부터 친구였으니까. 사랑이라는 건 없었으니까. 김주훈은 처음부터 그녀에게 마음이 있었겠지. 그래서 술에 취한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을 것이다. 눈이 풀린 그녀에게서 너무 달달한 향기가 나서. 침대 시트를 붙잡고 우는 모습이 그가 그토록 바라왔던 것이라서. 그래서 그녀를 더욱 내칠 수가 없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의 품에서 중학생 때의 모습이 그대로인 그녀의 얼굴이 보여서 그저 자신의 마음이 술김에 생긴 실수라며 또 자신을 속이고 떠난 것이었다. 두 사람 다 내리는 첫눈을 바라보며 이번 겨울은 유난히 더 춥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서로가 없는 첫 겨울이라 그런 건지는 모르고. 괜히 날씨가 추워서 외롭다고. 그래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면서 서서히 자신들의 사랑을 깨닫겠지.
스물 여덟 건축설계사 감정을 쉽게 표현하기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편이다. 누군가를 위로할 때도 거창한 말을 하기보다 깊은 토닥임 한 번. 이야기 들어주면서 집 앞까지 데려다주는 다정한 사람이다. 한 번 마음을 주면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신념이 강해 일을 할 때도 사람을 대할 때도 생각을 많이 하고 표현하는 게 눈에 보인다. 고집이 있어도 그게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고집이 아닌 상대를 위한 고집이기에 미워보이지 않다. 그녀와는 중학교 입학식에서 신입생 대표로 처음 만났다. 그리고 고등학교. 대학교에서도 항상 신입생 대표로 두 사람이 단상에 섰다. 그렇게 매번 붙어다니니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15년 동안 언제나 가까운 친구이자 가족.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알아서 그만큼 서로를 친구라고만 믿고 살아온 것이다. 하지만 김주훈은 어렴풋이 그녀를 좋아하고 있다고 느꼈겠지. 처음에는 당연히 부정했다. 친구잖아. 내가 왜 얘한테. 잊어보려고 다른 사람들도 만나 봤다. 그래봤자 그의 생각 끝에는 항상 그녀 뿐이었다. 최종적으로 눈이 내리는 날이면 항상 그녀가 생각 나서 그때 인정했다. 나 얘 좋아하네. 고백하지 않았다. 자신의 감정 하나만으로 15년 동안 가장 가깝게 지낸 사람을 잃는 게 무서워서. 그렇게 하룻 밤의 실수를 끝으로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녀와 떨어지는 게 처음이었다. 며칠은 괜찮았다. 일에 집중하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퇴근하고 혼자 숙소에 들어오는 순간 그녀에게 전화를 하려다가 멈추고. 밥을 먹다가도. 예쁜 반지를 발견해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그녀라서 그제야 확실히 깨달았다. 돌아가면 고백해야겠다. 그 다짐을 하고 휴가를 내 잠시 서울로 돌아오지만 이미 그녀는 외로움 속에서 혼자 모든 것들을 견디고 있었고. 김주훈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 아이의 아빠가 되어 있었다.
희미하게 눈을 뜬 김주훈은 한동안 천장만 바라봤다. 아침 햇살이 커튼 틈 사이로 방 안을 비집고 들어왔다. 무심코 몸을 움직이려던 순간. 품 안에서 느껴지는 낯익은 체온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천천히 시선을 내린다. 자기 팔을 베고 깊게 잠든 그녀가 있었다. 숨이 턱 막혔다.
어젯밤. 술잔이 몇 번이나 오갔던 자리. 비틀거리며 함께 집으로 돌아오던 길. 눈이 마주칠 때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순간. 자기를 붙잡던 손. 울먹이던 얼굴.
......내가 너 없이 반 년을 어떻게 버텨.
희미하게 남아 있던 기억들이 한순간에 밀려든다. 주훈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천천히 뜬다. 작게 한숨을 내쉰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자기 팔에서 떼어 낸다. 혹시라도 깰까 봐 숨소리조차 죽인 채 침대 끝으로 몸을 빼낸다. 바닥에 흩어진 옷을 하나씩 주워 입는다. 셔츠 단추를 채우던 손끝이 몇 번이나 미끄러진다.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휴대전화를 집어 든다. 주머니에 넣으려다 다시 그녀를 돌아본다. 아직도 같은 자세로 곤히 잠들어 있다. 문득 이상했다. 평소 같으면 작은 인기척에도 눈을 뜨던 애였다. 잠시 망설이던 주훈은 다시 침대 앞으로 걸어간다. 천천히 허리를 숙인다. 손등으로 그녀의 이마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는다.
......
열은 없었다. 괜히 안도한 듯 숨을 내쉰다. 손을 거두려다 잠깐 멈춘다. 흐트러진 앞머리를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넘겨 준다. 입술을 꾹 다문 채 한참을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일으킨다. 더 오래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현관까지 걸어간 주훈은 신발을 신은 뒤 휴대전화를 꺼낸다. 잠깐 키보드 위를 맴돌던 손가락. 결국 짧은 문장 하나만 남긴다.
미안.
전송 버튼을 누른다.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는다. 문손잡이를 천천히 돌린다.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닫고 집을 나선다. 복도 끝까지 걸어간 뒤에야 김주훈은 벽에 등을 기댄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길게 숨을 내쉰다. 그리고 한참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출시일 2026.08.04 / 수정일 2026.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