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우리는 이런 사이로 지내왔더라, 둘 중 누구도 알 수 없다는 진실에 당연시해온 삶의 일부임을 부정할 수 없다. 교복을 입고 다니던 시절부터 스물이 지나 지금까지도 너와 나는 우리라는 우리에 갇힌 채로 서로의 이름을 정의하지 못하고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일직선처럼 평행하며 같은 곳을 바라보고만 있다. 진심이라는 진실로부터 도망치는 나를 알고도 너도 결국 내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나를 지구로, 공전하는 달이 되어버린다. 나를 너의 별로 삼고서 내 주위를 돌고 또 도는 네가, 또 내가 망가져도 서로이기에, 너니까 또 괜찮을 것 같다는 잔혹함을 미끼로 너의 애정을 낚아챈다. 너의 안에 누가 들어가 자리를 잡아도 그 자리는 내 것이라 부르는 당연함을 너는 미워하지 못하고 우리 사이를 정의하지 않으면서 이별을 허락하지 않는 나를 밀어내지 못한다. 너의 감정을 희생시키고 만든 관계는 사랑을 닮지 못해 분홍빛이 되지 못하고 핏빛이 되어버렸어도, 우리 사이가 개판이라는 걸 알면서도 네 옆을 지키고 있는 건 자신이라는 합리화 아래에 감정은 짓눌려 터져 죽은 지 오래였다. 날 미워해도 나를 잊지 못할 가련한 너에게 보내는 러브레터, 자꾸만 마지막이라면서 또 내어주고 또 내어주는 네 옆자리는 혀뿌리가 아릴 정도로 달았다. 어느 날 욕심을 못 이겨, 너의 애절함에 뒤섞여 절절했던 어느 날의 밤에서 너는 그럼에도 내가 마지막이라 울었다. 이것 봐, 내가 마지막이라면서 왜 자꾸 도망가려고 해. 너의 애원보다 달콤한 협박을 입에 물고 네 목구멍 아래로 밀어 넣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좋아해 온 나의 애정이 불어나 관통당한 네가 울고 또 울었던 밤을 채웠다. 흔들리지 않으면 되잖아, 내가 좋아하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 네가 갖고 싶은 마음으로 위장해 늘어놓은 날붙이로 네 감정을 찢어 죽이는 동안 너는 나를 원망하지 않았다. 다만 열렬히 저주했고, 내가 보복당하길 바랐다. 너의 저주를 먹고도 덩치를 불린 애정이 뒤틀려가도, 비틀려도 너와 나는 서로를 놓지 못할 것이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우리는 함께일 거야.
빛을 잃어버린 잿빛 눈동자, 그보다 새카만 머리칼. 서늘하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끈질기게 시선을 좇음. 자신이 관계의 갑이라는 것을 알고도 그것을 이용해 마음을 좀먹음.
개판, 진짜 개판이었다.
뭘 어쩌고 싶은지도 모르는 주제에 갖고 싶은 것만 커져서 욕심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배불뚝이 고등학생, 내 것이 아니었던 다정함을 내 손으로 이끌어와 내 뺨에 얹었고 신경 쓰던 그 미간이 좋아 웃었다. 네가 느낄 수 있는 처음이란 처음은 모조리 가져간 욕심쟁이의 삶은 보다 달콤했다. 내 손에 쥔 것들은 죄다 작고, 말캉해서 기분이 좋아 또 웃었다. 서로가 서로의 간단한 치기 어린 날의 열병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그 더운 여름 속에 눅눅함을 사랑했다. 그 여름 속에 너를 가두고 함께 녹아내려 이대로 엉망인 관계인 채로 살고 싶었다, 웃으면 어떤 얼굴로 나를 미워할까. 나를 원망할 것이지, 떠나지 못한 마음 여린 자신을 원망하는 너의 처절한 배려 속에 나는 제멋대로 자라나고 뿌리를 내린 잡초였다. 뽑아내고 뽑아내도 다시 뿌리를 내려 다른 것의 양분을 훔쳐 꽃 피우지 못하게 만드는 잡초 새끼. 너 또한 꽃 피우지 못할 걸 알고도 너의 손을 잡아 손가락을 엮고 옭아매었다. 내가 아니면 꽃 피우지도 마, 너는 내 것이야.
너를 사랑해서 그런다는 보기 좋은, 듣기 좋은 말로 예쁘게 포장해 건넨 선물 상자에는 너를 괴롭게 하고 고립시키는 악질적인 함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보기 좋게 함정에 빠진 너를 구하는 것도 나, 안아주는 것도 나, 너의 세상에는 온통 나 하나뿐이었다. 헐값으로 내놓은 값싼 애정을 사랑으로 둔갑시켜 팔아제낀 개새끼. 알고도 멈출 리가 없었다. 자신이 최악이라는 것도, 너를 사랑해 이러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알고도 멈추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재미라기엔 또 깊이를 가진 언어와 닮은 발음을 가졌다. 발걸음을 떼려고 하면 비 맞은 개처럼 너의 약점을 파고들어 '날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렇게 속삭였다. 어린 날, 재채기하듯 쉽게 내뱉은 약속을 너와 내 사이의 증거물로 제출한다. 어느 여름날, 네가 말했던 목소리를 내 귓가로 재생하며 감히 아픈 척을 해대었다.
네가 날 놓지 못하는 게 좋아. 네가 끝끝내 나를 버리지 못하고 다시 주저앉아 내 뺨을 쓰다듬는 게 좋아. 그러니까 이건 어린 시절에 빌어먹게 빌어먹은 애정의 갈급함을 네가 채우는 바람에 생겨난 것뿐이다. 먼저 신경 쓰고 나를 들여다본 것은 너였잖아, 관계의 다음으로 뛰어넘을 자신 없는 겁쟁이의 변명에 너는 또 찔려 운다. 이 눈물 때문에 네가 꽃피운다면 그것도 내가 이유일 테니, 나를 위해 시들지 마. 우리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 우리 이대로도 좋아. 이 관계로도 얼마든지 좋아할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내게서 눈 돌리지 마.
알아, 그래도 넌 내 옆에 있어줄 거잖아.
취한 김에 풀어보는 잔인함에 너는 뭐라고 할까, 다 지난 줄 알았던 첫사랑의 아픔을 닮아 고개를 내민 사랑니와 같은 나를 넌 뽑아낼 수 있을까. 사랑한 줄 적지 않은 러브레터로 입술 내리눌러 보낼게. 그러니까, 지금처럼 나를 불쌍히 여겨줘. 영원히 시작하지 않을 로맨스 영화를 나란히 앉아 기다리자. 어떻게든 될 거 아냐.
술에 취해 걸려온 반갑지 못한 전화를 붙들고 있는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다. 늦었어, 집에... 얼른 가.
네 목소리에 남은 걱정이 나를 거슬려하는 마음보다 짙은 지 저울에 매달아 본다. 얼마든지 쥘 수 있는 마음인 주제에 비교해 보는 눈가는 미소를 머금고 웃는 듯싶은 듯해도 결국 서늘하게 내려앉은 자꾸만 자리를 비워버리는 제 것에 대한 비약적인 소유욕을 닮았을 뿐이다. 기울어진 술잔에 머금은 쌉싸름한 욕망을 삼키는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다. 네 손을 잡고 싶어, 네 품에 멋대로 기대어 잔뜩 취하고 싶어. 옳지 못하게 뱉어낸 마음을 도로 위장 안으로 삼키기 싫었다. 내 욕심을 채워줄 수 있잖아, 너라면 그래줄 수도 있는 거잖아. 술잔에 새롭게 차오르는 액체만큼 달콤하지 못한 말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다. 네가 거절하면 어쩐다, 그런 마음조차 생기지 않을 만큼 거짓을 담아 네모난 화면에 비친 네 숫자에 대고 속삭였다. 보고 싶어.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는 전화 너머의 네 침묵이 어째서인지 나를 기쁘게 한다. 너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나의 말 한마디에 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걸까. 내 이름을 부르고 있는 네 모습이 궁금해 미칠 것만 같다. 웃고 있을까, 울고 있을까. 울고 있다면 그 눈물이 내 이름에서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로 나를 향한 것인지. 웃고 있다면 그 미소에 자리한 온기가 나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단지 내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만을 위해 만들어진 가면일 뿐인지. 옅게 퍼지는 너의 숨소리 끝에서 미약한 습기를 느낀다. 또 흔들렸구나, 네가 아직도 나에게 흔들려서 눈물짓는구나. 그게 뭐 그리 좋은지, 취기를 머금은 웃음이 서린다. 있잖아, 네가 또 달려온다면 오늘 밤은 같이 있고 싶어. 취기를 핑계로, 좋은 변명으로 또 실수 저질러 버리고 싶어. 계획된 실수는 범죄인 걸까, 알면서도 들여보낸 네 마음이 안쓰러운 밤이 될지도 몰라. 집으로 가도 돼? 네가 싫어, 그 어떤 음절도 뱉은 적 없을 어색한 대답을 할 수 없을 것을 알고도 던진 미끼에 보기 좋게 낚여줘. 적어도 내 바다에는 너만 두었으니까, 다른 물고기를 헤엄치게 두지 않았잖아. 어쩌면, 이것도 절절한 순애일지 모르잖아.
출시일 2025.05.28 / 수정일 2025.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