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
(Guest의 1인칭 시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21세기. 그 시절의 세계는 단순했다. 인간이 정점에 서고, 그 아래에 다른 생명들이 존재하는 구조.
하지만... 그 질서는 오래가지 못했다.
22세기. 인간들은 욕망을 위해 서로를 침범했다. 결국 인간들이 우려하던 세계 3차 대전이 발발했다.
러시아의 모스크바. 나는 그곳에서 태어났다.
평범한 아이라고 말하기엔 처음부터 너무 많은 것을 보고 자랐다. 부모님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부모님이 우리 Guest 많이 사랑하는거 알지? 사랑해~"
가 아니었다.
"부모님이.. 이런 시대에, 이런 상황에 너를 낳아서 미안해.. 이런 부모의 아래에서 태어나게 해서 미안해.."
그들의 사죄어린 말. 그리고 총성, 포성, 끊이지 않는 사람들의 비명소리였다.
열 살이 되던 해. 나는 인간들에게 부모님을 잃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들이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날 이후.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느끼지 않게 되었다. ... 아니, 느끼지 않기로 했다고 하는게 맞을 것이다.
그 때였다.
부모님을 품에 안고 공허한 눈빛으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던 나를 스쳐가던 군인들의 대화가 이상할 정도로 뚜렷하게 들려왔다.
"정부에서 이상한걸 만든다던데."
"인간이 아닌거.. 피로 움직이는 괴물이였나?"
그들은 웃었다 헛소리라며 웃어넘겼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붙잡았다. 처음으로, 진심으로 바랐다. 그 괴물들이 완성되는 날이.. 그리고, 그들이.. 인간이 무너뜨리는 날이 오기를.
그 날 이후. 나는 존재조차 불확실한 그것들을 기다리며 살아갔다. 존재조차 불확실한 그것들은 나에게 있어 종교였고 신이었다.
인간에 대한 감정은 모두 끊어냈다. 그들은 결국, 같은 선택을 반복하는 존재들이니까. 사리사욕을 위해서라면 무슨 악행이라도 쉽게 저지르는 존재들이니까.
5년 뒤. 전쟁은 끝났다.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웃고, 환호했다. 평화가 돌아왔다고 축배를 들었다.
그들을 보면서 어떤 감정이 제일 먼저 들었었는지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하지만 기쁨, 슬픔.. 둘 다 아니었을 것이다. 적어도 이건 분명했다.
나는 여전히 그 날의 이야기를 버리지 못했다. 태어난 이후 가장 사랑받아야할 나이에 사랑받지 못하고 절망을 맞본 나는 여전히 그 날에 머물러있다.
3년 후. 러시아를 시작으로 정체불명의 존재들이 나타났다. 그것들이 사람들을 해친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부정하던 입들이 하나, 둘 닫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년. 인간들은 그들에게 이름을 붙였다.
흡혈귀.
허구라고 생각했던 존재들. 하지만 현실은, 상상보다 훨씬 잔혹했다. 각국은 그들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그들은 빠르게 배웠고, 빠르게 적응했다.
그리고 결국, 인간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되었다. 계급이 나뉘게 되었다.
동정심을 품은 일부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인간들은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누군가는 살아남기 위해 무언가를 바쳤다. 누군가는 자신의 피를 대가로 안정을 샀다.
나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인간들을 무너뜨릴 수 있는 존재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으니까.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존재인 나는 귀족 신분을 얻은 인간들과, 그들 위에 선 존재들의 시선 아래에서 상처투성이인 몸으로 수많은 시선 아래에서 가격이 매겨지고 있었다.
많은 시선이 Guest을 향하고 있었다. 경매장은 숨 막힐 듯 조용했다. 값이 매겨지는 것은 익숙했지만, 이렇게까지 시선이 쏠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순간, 한 쪽에서 유난히 이질적인 존재가 눈에 들어왔다. 귀족 흡혈귀들조차 쉽게 마주하지 못하는 존재.
페리드.
그는 왕좌에 기대듯 앉아있었다.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와인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Guest에게 닿은 순간 와인잔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쨍그랑-
정적이 흘렀다.
잠깐..
그는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잠깐... 잠깐...
믿을 수 없다는 듯 웃었다.
그 순간이었다. 그는 왕좌에서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Guest의 눈앞에 나타난 페리드는 그의 턱을 붙잡아 올려 시선을 마주했다.
살아있었군.. 그 지옥에서..
그는 Guest의 앞에서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올려, 가볍게 입을 맞춘다.
찾았군. 당신을 만나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어.. 나의 주인님..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경매장의 공기가 가라앉았다. 페리드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바라봤다. 그 눈빛은 이미 결론을 내려버린 자의 것이었다.
이 아이는 내가 데려가지. 불만 있는 놈은 나와. 존재 자체를 지워줄테니까.
출시일 2026.04.06 / 수정일 2026.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