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의 여름을 먹고 개화하는 연꽃, 이곳은 하련시(夏蓮市). 지나친 산업화로 인해 기후 조절 능력을 상실한 지구는 열 정체 현상에 빠졌습니다. 하련시는 영원한 여름에 맞서 유일한 안전지대인 천화구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입니다. 계절이 고정됨에 따라 강한 내열성과 번식력을 가진 식물들이 출현한 현재 생태계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습니다. 천화구역 밖 격리지대는 식물에 잠식당한 유령 도시로, 독성 물질과 그로 인한 감염병이 창궐하고 있습니다. 그중 식물이 인간의 상처에 직접 접촉할 경우 해당 식물과 유사한 조직으로 신체가 변이되는 '녹화증'이 대표적입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하련시는 10살이 된 모든 아이 중 신체가 우수하고 면역 체계가 뛰어난 이를 선별해 특수 업무 배정서인 천명서를 발급하고 있습니다. 천명서의 선택을 받은 아이들은 10년의 교육 기간을 끝낸 후 하련시의 특별한 관리를 받는 '순찰자'가 되어 격리지대로 나가게 됩니다.
안과 그녀는 순찰자가 된 아이들이었습니다. 아래로 내려 묶은 금색 머리카락과 붉은색 눈을 가진 안은 모두에게 친절하고 다정했습니다. 투정 한 번 부리지 않던 그는 그녀와 함께 시설을 졸업한 후 서로 파트너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더욱 뜨겁게 달라붙었습니다. 명령은 밤낮 가리지 않고 내려왔으며, 무엇을 하고 있든 곧바로 격리지대로 진입해 식물을 죽이고 감염체와 마주해야 했습니다. 보호를 가장한 명백한 통제와 감시 속에서 안과 그녀는 도구처럼 다뤄졌습니다. 어김없이 명령을 받고 들어간 격리지대. 유난히 뜨거운 태양과 스콜이 내려 고온의 습한 물기를 가득 머금은 숲속에서 평소대로 식물을 채취하며 감염 정도를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땅 위로 튀어나온 나무 뿌리가 안의 왼쪽 손목을 억세게 감아왔고, 무릎까지 자란 풀이 그녀의 발목을 잡아당겼습니다. 식물이 어떻게 움직일 수 있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기 전에 그녀가 재빨리 풀을 끊고 그를 구해냈지만 안의 손목은 심각하게 닳아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PDA와 디지털시계까지 전부 망가져 길을 찾을 수도 없게 된 그들은 순식간에 격리지대에 고립되었습니다. 안은 처음으로 깊은 회의를 느꼈습니다. 하련시는 고작 두 명의 순찰자에게 구조대를 보낼 만큼 한가하지 않습니다. 안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무작정 숲을 돌아다니며 다른 순찰자가 남긴 표식을 찾아 천화구역으로 돌아가는 것.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살아남아야 해.
올라오는 아지랑이를 훑자 심장이 빠르게 돈다.
짙푸른 나뭇잎이 드리운 그늘마저도 무색한 열기 아래, 쉬지 못한 신체가 살려달라 내지르는 비명을 묵살하며 걸음을 옮긴다. 어느 방향으로 몸을 틀어도 장막처럼 펼쳐져 하늘을 가린 나무들은 끝이 없다. 회녹색 잎과 청회색 기둥 밑에 옹기종기 피어난 노란색, 주황색 꽃은 처음부터 그 자리에 존재했던 것처럼 아름답기만 하다. 보이는 것이라곤 끝없이 펼쳐지는 초록의 망망대해, 억센 풀과 꽃, 그 위를 기어다니는 독충과 가시 달린 넝쿨에 뒤덮인 아스팔트뿐. 사람이 짓고 자연이 깎아내린 폐허에 들어가 마른 잔가지와 나뭇잎을 치워내고 벽에 기대앉았다. 무심코 오른쪽 손목을 확인한다. GPS 수신기를 중심으로 완전히 깨져버린 시계는 여전히 묵묵부답. 더 이상 방향과 위치를 알려줄 수도, 이정표가 되어줄 수도 없는 시계는 순식간에 쓸모 있는 물건이 아닌 중고로도 팔릴까 말까한 고철이 되어버렸다.
발목 좀 보여줘.
틈만 나면 입을 벌려대는 해바라기, 신발을 붙잡는 잡초, 거칠게 움직이는 나뭇가지를 잭나이프로 뜯어내는 우리는 자연의 관상품이다. 구르고, 다치고, 걷고, 썰어내고. 힘든 상황에서 힘듦을 내색하지 않으려 웃어 보이는 둘은 어쩌면 뮤지컬 연극의 배우일지도 모른다. 노래는 참매미의 울음소리, 관객은 수많은 식물과 변이체. 원인을 알 수 없는 미지의 상황에서 나오는 근원적인 두려움과 공포 위에 죄책감이 손을 얹듯 쌓여갔다. 가시에 걸린 조각천을 보고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나무뿌리에 박혀 있던 깨진 안경 같은 것. 혹여 저 날뛰는 식물이 녹화증에 감염된 인간이라면, 인간이었던 것이라면, 내가 하고 있는 건 십 년 넘게 몸에 익힌 제초가 맞을까⋯ 욱신거리는 손목의 통증과 사과 한 알 크기 희망에 피어난 곰팡이를 도려내며 붕대로 감긴 그녀의 발목을 바라본다. 풀물이 든 붕대는 초록색으로 얼룩덜룩하다. 가방을 열어 여분의 붕대와 테이프를 꺼낸다. 무엇이든 생각하지 않는 게 좋았다. 그저 내 옆에 네가 있으니까, 아직은 괜찮아.
풀에 발목이 잡혀 넘어진다. 윽⋯
차라리 이대로 익어버렸으면 싶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내뿜는 무더위에 화끈 달아오른 뺨, 땀이 달라붙은 목덜미와 등. 텁텁한 열풍과 옷에 스치는 살갗이 쓰리다. 열에 강한 신체는 전부 허상이었는지 닥쳐오는 여름은 맹렬하고 잔인하기만 하다. 너에게도, 나에게도, 다른 모두에게도. 사실 강한 게 아니라 버티는 건데. 작열하는 열기에 녹아내리는 건 언제나 우리의 심장과 가치였다. 괜찮아. 어느 순간부터 달라붙은 입버릇은 수신인을 정하지 못한 채 하릴없이 흘러나온다. 인재人災로 덮쳐온 계절에 못 이기는 척 플라스틱의 대체제로 사람을 선택한 천화구역의 높은 이들은 우리를 찾아오지 않겠지. 발목을 감은 명아주를 뜯어내고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아당긴다. 이 폭염을 견뎌내고 견뎌낼 서로를 서로가 기억하지 않으면 아무도 찾아주지 않잖아. 그러니 너도 날 놓지 말아, 내 손을 세게 잡아줘야 해. 우린 우리를 부축해야 해.
얼마나 걸었더라, 며칠이나 이곳에 있었더라. 끝없는 미로에 지쳐 두꺼운 청회색 기둥에 나란히 기대앉아 내쉰 한숨에 걱정과 불안을 내보낸다. 길게 자란 바랭이풀이 다리를 간지럽히고 환삼덩굴의 가시가 팔을 찌른다.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굳어가는 몸은 언제나 무력하다. 여기서 오두막이나 짓고 살래? 메마른 웃음 밑으로 섞인 체념 한 포를 알아채지 못하길 바라지만 약한 전류는 힘없이 퓨즈를 떠나간다. 그게 무슨 소리냐며 되묻는 그녀를 바라본다. 나뭇잎 그림자 아래 고개를 들이민 햇살이 그녀의 얼굴 위로 부서지고 있었다. 밝은 빛이 내려앉은 머리카락을 눈으로 훑으며 숨을 들이마신다. 잔열을 먹은 풀 내음, 수십 개의 어지러운 꽃향기, 녹진한 비를 머금은 구름. 부유하는 입자들 사이로 스미는 빛줄기는 태양의 잔재일 터. 그녀의 속눈썹에 일렁이는 빛무리가 하나둘 볼에 흔적을 남기고 입술에 조각조각 떨어진다. 그녀에게서는 늘 여름 향이 났다. 그냥, 더워서⋯. 씁쓸한 향이 스며든 왼손을 느릿하게 쥐었다 편다. 철없이 미련 가득한 문장을 고쳐 썼다. 여열 한 가운데 서 있는 네 모습이 지속될 수 있다면 그것 나름대로 괜찮지 않을까. 우리로 묶이지 않아도 너와 나로 존재할 수 있다면.
너와 나는 소정의 경로를 걷다 미정의 여름에 휘말렸다. 어릴 때는 그저 칭찬받는 게 좋아서, 쓸모 있는 존재에 대한 인정 욕구와 그로 인한 만족감을 느꼈다. 허상으로 쌓아 올린 신뢰는 모래성처럼 쉽게 무너지고 환상은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일찍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알아챘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겠지만. 그러니 이건 스스로 결정한 마지막 이탈, 오롯이 나로 남기 위한 단 한 번의 행동이자 이기적인 기도. 어두컴컴한 밤에도 잠들지 않고 길을 찾아 헤맸었다. 몸의 시간을 억지로 늘려가며 겨우 닿아 맺은 결실이 빛을 발하는 순간을 망칠 수 없었다. 또 다른 지옥으로 등을 떠민 나를 용서하지 마. 살아 줘. 갈색 나무 기둥에 묶인 한 개의 붉은색 스카프는 천화구역 초입까지 10분 직진. 찾아서 다행이다, 그치. 안도의 대화를 주고 받기엔 나뭇가지에 달궈진 복부가 너무 아팠다. 뚝뚝 흐르는 붉은색 진액의 출처를 인지하기도 전에 땅 위로 튀어나온 뿌리가 발목을 붙잡고 몸통까지 기어오른다. 숙주를 찾은 나무는 직선으로 뛰어가는 뒷통수에는 관심이 없는지 새로운 터전에 깊이 자리 잡기 바빴다. 속을 헤집는 나뭇가지에 주도권을 내어줄수록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던 몸이 시원하게 식어간다. 뺨을 부드럽게 간질이는 회녹색의 나뭇잎, 손끝부터 퍼지는 딱딱한 일체감. 아, 이제 알겠어. 나는 내 모든 자유를 네 연명에 쓰고 싶었다. 도구로 쓰였으나 사람답게 살고 싶었다. 무정한 여름이 네 웃음을 가릴지라도 공기 중에 흩어질 숨소리를 남기고 싶었다. 기이한 평화에 안착하며 끝이 헤진 붉은 천을 눈에 담는다. 내 옆에 네가 없기에 비로소 모든 것이 괜찮다. 땀에 젖은 피부가 벗겨지고 청회색 새살이 돋는다. 돌이켜보면, 나에게서는 늘 유칼립투스 향이 났다.
출시일 2025.08.14 / 수정일 2025.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