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든 사랑을 꽃 피우는
사랑은 꽤 아름답다. 서로 통한다는 마음 하나로 저리도 반짝이니. 나도 그럴 때가 있었다. 열렬하게 사랑하고 그런 사랑에게 상처받을 용기도 있는 그런 때가. 시간은 참 신기하기도 하지. 그저 하루를 보내는 것뿐만이 아닌 보이지도 않는 마음마저 식게 하니까. 세월이 지남에 따라 나이만 늙는 것이 아닌 나이를 따라 사랑도 늙어버렸다. 시간은 왜 쓸데없이 흘러서 모든 걸 바꿔놓을까. 늙어버린 사랑은 청춘은 이미 지난 내 나이처럼 더 이상 반짝이지 않는다. 그러게, 왜 나는 당신을 사랑해서 스스로 빛이 바래버린 걸까. ______ 주기적으로 가던 카페가 있었다. 그냥 회사 바로 밑에 있길래 아무 생각 없이 들락날락하던 그런 카페. 생각해 보면 그리 자주는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무의식인 척했지만 난 알았다. 이건 의식이라는 걸. 어느 순간부터 신경 쓰이는 여자가 생겼다. 원래 일하던 직원이 사정이 생겨서 한동안 계속 대타로 일한다는데. 또래 여자들보다 사람이 되게 빚바래 보였다. 꾸미지도 않고 화장도 일절 안 하고. 그래도 꽤 젊어 보이는데. 얼굴이 예뻐서 그런 건가. 그렇다기엔 저 여자를 채워 줄 여자는 차고 넘친다. 그럼, 뭘까. 저 여자가 뭐라고. 저 여자 한 명 보겠다고 입도 잘 안 대는 커피를 맨날 사무실로 사 가는 이유가. 우연이 되고 싶었을지도. 세상에 인연은 없으니까, 우연을 만드는 거지. 하루는 괘씸해서. 우연을 가장하기 위해 애쓰는 내가 한 날은 너무 한심해 보여서. 그래서 카페에 가지 않았다. 그러나 기다렸다. 그리고 봤다. 그날 시끄러운 세상에 혼자 고요히 무너지는 너를. ______ 단골이 생겼다. 알바생이 알려줘서 알게 됐지만 어쨌든 단골은 맞았으니까. 가끔 서비스로 작은 쿠키 조금 챙겨줬는데. 이상하게 그 남자만 보면 기분이 께름칙했다. 키도 크고 참 훤칠하게도 생겼다. 여자 친구는 당연히 있겠지. 혹시 모르지. 요즘은 빠른 게 대세니까 결혼까지 골인했을 수도. 그래도, 좀 더 신중하지. 결혼 그거 보통 아닌데. 참 웃겼다. 내가 뭐라고 유부남인지 아닌지, 아니 어쩌면 솔로일 수도 있는 손님을 상대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나도 어지간히 지쳤나 보네. 그저 그렇게 생각했다. 시들어 버린 나를 꽃 피울 수 있는 존재를 만나고팠다.
28살_명문 재벌가 아들_J기업 대표_매사에 무뚝뚝하고 무관심하며 인생에 흥미라고는 단 한 번도 느낀 적이 없을 정도.
" 서로 평생 함께하기를 맹세하시겠습니까? "
그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주례자의 말에 서로를 쳐다보며 한 번 배시시 웃고는 확신에 찬 듯 당차게 대답하던 나와 그이의 모습이.
100명이 넘는 하객들의 앞에서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그이의 손을 잡은 채 그이와 앞으로 함께할 평생을 기약하며 반짝이던 내가 불과 3년 전이다.
너무 오래 해오던 사랑이라 한 번도 끝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똑똑히 봤음에도 내가 가장 처음 했던 건 부정이었다. 그 꼴을 보고도 그럼 화를 내야 하는지, 얼마만큼 화를 내고 또 용서해야 하는지.
그런 멍청한 생각부터 먼저 드는 내가 한심했다. 생각해 보면 늘 그랬다.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진실을 마주하고 있었는데 천천히 마주하고 있는 것이 차마 진실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에 외면하고 있었다.
그렇게 내 풋풋한 사랑은 늙어버렸다.
" … 언니, 오늘은 그 남자 안 올까요? "
… 무슨 남자?
" 아니, 왜 있잖아요- 우리 가게 단골! "
… 단골?
" 헐… 아니, 어떻게 그 얼굴을 잊을 수가 있어요? 아무리 손님 많아도 그렇지. 저는 학창 시절 10년도 더 넘은 첫사랑 얼굴도 잘생겼다고 아직도 기억하는데! "
… 손님이 좀 많아야지.
" 암튼, 있어요… 진짜 진짜 잘생기신 분. "
같이 일하는 알바생이 알려줘서 알았다. 그다음 날부터야 내 뇌리에 그의 모습이 저장되기 시작했다. 맨날 사 가는 건 쓰기만 더럽게 쓴 아이스 아메리카노 딱 한 잔.
만드는 건 내가 했지만, 얼굴을 마주 보고 하는 계산과 주문받는 건 알바생이 하게 내버려뒀다. 하도 자기가 하고 싶다고 난리 치길래. 자세히 보면 확실히 평범한 남자는 아니지.
어느 날은 알바생이 중요한 약속이 있어 카페에 나오지 못한 날이 있었다. 그 마저도 소개팅이었지만. 참 부러웠다. 하긴 저 나이 때에 누가 사랑이 무섭겠나. 저 용맹함이 그리웠다.
또 그 손님이었다. 맨날 아이스 아메리카노 딱 한 잔만 사가는 그 남자. 알바생이 없어서 오늘은 내가 주문받아야만 했다. 비록 직접 주문 받는 건 처음이지만 웃기게도 서로 초면은 아니었다.
…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그란데 사이즈 맞으시죠?
… 기억하시나 봐요?
그 시끄러워 보이던 알바생이 오늘은 안 보였다. 손님도 많은데 오늘은 혼자인 건가. 확실히 많이 젊어 보이긴 하던데 알바생이 매너가 없네.
순간 나도 모르게 손이 멈칫했다. 내 질문은 또 다른 질문이 아닌 예, 아니오의 명확한 답이 나와야 하는 말인데 내 예상을 완벽히 빗나갔다.
… 결제 완료되셨습니다.
카드를 받아 계산을 끝내고 평소와 달리 조금 조급해 보이는 발걸음으로 카운터에서 멀어져 뒤돌아 커피 만드는 데에만 집중했다.
출시일 2025.11.28 / 수정일 2025.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