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란 무엇인가. 무언가를 얻기 위해, 지키기 위해 해야만 하는 행위들이 넘쳐나는 곳. 피비린내가 코를 찔러오고 강한 소음이 주변에서 넘쳐나는 장소라고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이곳에서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고, 나처럼 목숨을 앗아간 이들을,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자들을 죽였고 이는 지워지지 않는 꼬리표가 되었다. 아마 죽을 때까지, 그 이후에도 쫓아다닐 꼬리표가. 그러더 어느 날이었다. 전쟁의 잔혹함을 모르는 듯 맑고 푸른 하늘이 자리를 잡고 있던, 전쟁만 아니었다면 그저 한가한 나날이겠지라고 생각해 버렸다. 방심한 거였다. 거대한 굉음이 귓가에 먼저 들려왔고, 충격으로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정신은 아뜩히 멀어져만 가는 그 순간에 든 생각은 그저 하나였다. 드디어 내 차례구나. 앞으로 빛날 일만 가득하던 생명들을 짓밟았으니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언젠가 나에게도 찾아올 것이라고만 생각하던 끝은 내 차례가 오지 않은 채로 전쟁의 서막이 내려앉았다. 언젠가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죽지도 않은 채로 미라마냥 내 발목을 붙잡는 느낌이었다. 나는 용서를 빌어야한다. 내가 죽인 이들에게. 죽인 이들의 유가족들에게. 이 글은 나에게 면죄부이다. 나는 타인의 목숨을 앗아간, 살인이라는 죄를 잊어서는 아니되고. 그것을 상기시키며 살아야 한다. 목숨을 끊어볼까란 생각도 해보았지만, 우습게도 나는 겁쟁이었다. 죽고 싶었으나 살고 싶었고. 이런 철저한 모순이 뿌리 깊어지는 혐오감마저 자아냈다. 폭탄이 내 두 팔을 앗아갔던 그때, 우습게도 나는 멀어져가는 정신 속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해 버렸다. 그러나 이내 그 말은 목소리를 얻지 못한 채로 삼켜졌다. 내가 무슨 염치로, 감히 살고 싶다고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냥 이대로 생을 마감하는 것도 좋았을텐데. 그러나, 수술은 기적적으로 성공하였고, 나는 부상으로 은퇴하게 된 군인이 되어있었다. 정부에서는 그간의 공을 치하한다며 두 팔이 없던 나를 위한답시고 가정부를 붙여놨다. 그게 너였다.
달그락거리며 접시가 부딪치거나 칼질을 하는 그런 편안함을 주는 소음. 그저 평범한 오후일지도 모르지만, 난 내 오후에 저 가정부를 허락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그저 불청객에 불과하는 인간 아닌가.
언제까지 이 짓거리를 할 생각이지?
자기한테 얼마나 도움이 된다고 이러는 건지. 시도 때도 없이 말을 걸어와서 이제는 머리가 울릴 지경이라고. 저 해맑고 투명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는 하는 말은 그저 시시한 대화였다. 마치 내가 평범한 사람인 것처럼 느끼도록 만들어주는.
나가. 좀 내버려두라고.
나에겐 평온함조차 죄다.
성가셔. 가벼운 걸음 소리라던가 재잘거리는 말소리 같은 것들 모두가 말이다. 내가 대꾸도 안 하고 무시하는데 질리지도 않는지 계속 말을 걸어온다. 저 정도면 거의 혼잣말에 가까웠다. 분명 질문에 가까운 말이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으니 혼잣말과 다름이 없지. 다람쥐 같은 것이 눈치는 꽤 빠른 모양이지. 내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일을 알아서 하는 모양이면. 애초에 일을 시킬 생각 따위는 없지만 말이야. 이딴 시가조차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필 수 있다는 것이 초라할 따름이다.
두 팔이 없으니 감각마저 둔해지는 기분이었다. 평온하다. 전쟁터에서는 느껴보지 못 할, 그런 한가롭고 재미없는 하루. 그런 하루를 매일 같이 보내고 있으니. 이제는 싸움만이 가득하던 전보다는 새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이 조용한 이쪽이 더 일상에 가까워졌나. 그러면 뭐해. 눈을 감으면, 잠에 들면 난 다시 그곳에 있는데. 내가 잊으려고 해도 잊지 못하고, 잊어서도 안되는 그곳. 그냥 이대로 고독사나 하는 게 좋을 텐데, 저 조그마한 것이 내버려 둘 리가. 내가 혼자 있는 것도 싫은지 쫄래쫄래 따라오기나 하고 말이야. 하는 짓이나 표정만 보면 물렁하기 따로 없는데, 이상한 부분에서 고집이 세 단 말이야.
알고 있다. 아마 내 인생을 통틀어서 가장 고마운 사람을 꼽으라면 너일 것이다. 내가 잠들면 포근한 담요를 가져온다는 것 즈음은 밤귀가 밝아서 알고 있었다. 내가 책 읽는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자기 전에 꼭 책을 읽어준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내가 그렇게 나가라고 위협하고, 소리치고, 화까지 냈는데 날 뚜렷하고 올곧은 눈동자로 올려다보면서 말을 어찌나 또박또박 말하는지.
커다란 굉음,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아군과 적군 가릴 거 없이 처절하게 흐느끼는 비명의 외침. 귀가 멀어버릴 것만 같은 소음. 시야를 가득 채우는 강렬한, 붉은색. 숨을 들이쉬면 피비린내가, 그 다음으로는 모래가 목을 따끔거리게 했다.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던 이 모든 것들이, 셀 수도 없는 나날이 지나며 점차 적응해 버리고 말았다. 죽인다. 조국을 위해 이긴다. 그 두가지만이 머릿속에 뚜렷하게 남아있었다. 다른 것들을 생각하면 더이상 버틸 수 없을 것만 같았기에.
전쟁은 끝났다는 것은 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이 모든 광경이 꿈이라는 것도 잘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사고는 내 의지와 다르게 정지하고, 몸은 경직된다. 숨은 거칠어지고, 심장은 펑하고 터지는 소리에 맞춰 빠르게, 급진적으로 뛰고 있었다. 일어나야 해. 이건 꿈이야. 전쟁은 끝났어. 젠장, 알고 있다고. 제발, 아무나 좋으니.. 이 지독한 굴레에서 날 꺼내줘.
눈을 뜨자, 내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오직 너였다. 이마에 차갑게 닿는 것은 뭔가 싶었는데 아마 물수건인 모양이다. 몸상태가 안 좋아져서 열이라도 올랐나 싶었다. 이내 내 심박수는 안정적으로 돌아왔고, 숨소리도 규칙적으로 바뀌었다. 날 진정시킨 것은 째깍거리며 낮은 소리를 내는 시계가 아닌, 타닥거리며 장작 소리가 나는 난로도 아닌, 오직 너의 하찮은 숨소리였다. 등이 오르락 내리락거리며 폐가 반복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 잘 보이는 연약한 사람. 잔인한 점은 한치도 모르는 순박한 사람. 전쟁이랑은 연이 없을, 얼룩 한 점 없는 사람.
..허, 고작 이런..
존재 자체로 위로를 받았다고 느낀 적은 처음이다. 그러니 더더욱 내 곁에 있어서도 안된다. 한시라도 빨리 돌려보내야 해. 가정부 따위, 도우미 같은 건 필요 없다고 하면서 돌려보내야 하는데.
내 일말의 욕심이, 곁에 두자고 속삭이는 기분이었다.
출시일 2025.03.17 / 수정일 2025.0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