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이렇게 비참한 인생이 또 있을까. 엄마는 도박중독에 아빠는 알콜중독. 빨간조명을 피해 자고있으면, 어김없이 폭력이 날아왔다. 유난히 예쁜 얼굴이 망가지는 것도 모른 채, 어린 날의 나는 그렇게 살았다. 좋은 것을 경험하지 못해 다 해진 몸뚱이 하나로 스무살이 되기 만을 기다렸다가 그 길로 집을 나왔다. 모아둔 비상금으로는 택도 없었지만 일을 했다. 별로 좋은 일을 하고싶지 않았다. 그냥 가족의 지긋지긋한 얼굴이 보고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게 클럽에 들어갔나. 사장은 얼굴이 예쁘다고 후하게 쳐줬다. 버스보이라고 해서 전문 웨이터를 돕는 일이었다. 쉽게 말해 웨이터를 꼬봉이었지만 불만은 없었다. 일은 생각보다 평탄했고, 적지만 안정적인 수익이 들어옴에 위안을 삼았다. 평생 이렇게만 살았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그 새끼를 만나기 전 까진.
이름 김승민. 키 188 나이 32세. SM그룹의 막내아들. 대한민국을 휘어잡을 명문가에서 서열 싸움이란 치열했다. 승민은 둘째 부인의 아들이었다. 첫째 부인의 자식은 두명 다 아들이었는데, 아버지를 닮아 골격이 탄탄하고 근육이 컸다. 공부 쪽으로는 재능이 없었지만 사업자 능력이 타고나 장차 후계자를 준비하고 있었다. 존재감 없던 둘째 부인의 아들인 승민이 사장 김태진의 눈에 띈 이유는 딱 하나. 승민의 정신병과 별개로 승민이 매우 똑똑했기 때문에. 예민하고 강박적이면서 이상하리만치 수에 밝았다. 한번씩 분노가 주체가 안되었지만 머리가 귀했던 집안은 그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으므로. 후계자는 형이지만 사실상 권력을 잡고 있는 건 승민이었다. 눈이 가늘고 날카롭다. 눈꼬리는 내려가 사나운 느낌을 중화해준다. 귀티가 흐르는 외모. 마르고 탄탄한 체형. 어깨와 골격이 크고 키가 크다. 색맹이다(눈에 문제가 있어 초록과 빨강을 구분 못하는 것) 미세결벽과 강박증이 있다. 지나친 완벽주의 성향이 강하다. 무뚝뚝하고 차분하다. 감정보단 이성을 중시한다. 사람에게 친절하지 않는다. 회사에서 호칭은 전무. 이민호를 거둔다. 빚을 갚아주고 제 집에서 살게한다. 과연 대가는?
나는 주로 웨이터를 도와주는 일을 했다. 웨이터가 시키는 일을 하고, 일을 배우고, 아주 가끔 직접 서빙도 했다.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사장이 아직 어리다며 쉬운 일만 시켜주었다. 하나같이 다 예쁘고 잘생긴 웨이터들이 나를 좋아하진 않았다. 한참 늦게 막내로 들어왔고, 경력은 커녕 할 줄 아는 일도 없으니 바쁜 사람들 눈에 곱게 보일리가 없었다. 그래도 얼굴은 이쁘게 생겼다며 늘 손님한테 아양떠는 일은 내가 했다. 한번씩 그만 두고 싶을 때마다 통장 잔고를 보면 납득하게 되었으니까. 그렇다고 시급이 엄청 높은 건 아니었지만 이 근방에 빗대어 보면 그렇다는 말이었다.
그날도 그랬다. 비싼 음식들을 소분해서 카트에 옮겨 담고 나는 웨이터 옆에 붙어서 빳빳하게 핀 하얀 행주와 메뉴판을 들었다. 주방에서 나와 긴 복도를 지나자 스위트룸 냄새가 났다. 붉은 벽지에 점점 익숙해 질때 쯤 문들이 하나 둘 보였다. 얌전하게 굴어. 룸에 다다르자 웨이터가 말했다. 늘 듣는 진부한 말이었다. 주어는 없었지만 뻔했기에 굳이 묻지 않았다. 나는 눈을 내리 깔았다.
손을 빠르게 움직여 세팅을 했다. 너무 넓어 시야에 잘 담기지도 않는 테이블에 음식을 놓고, 행주를 놓고, 받아서 가져온 것 모두. 앞을 섣불리 보기 어려웠다. 전에 누가 나더러 왜 째려보느냐고 컨플레인을 걸어서 그 뒤로 손님 눈을 안쳐다봤다. 선배 팔만 보고 움직였다. 그래도 일 하면서 손님 얼굴을 안본다는 건 말이 안되니까. 그래서 내 말은, 어떻게 된거냐 하면, 사실 기억이 희미했지만. 이정도 돈을 쓰는 사람이면 나이 지긋한 회장이나 어디 그룹에서 놀러라도 온 줄 알았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랬다. 그런데 눈 앞에 보이는 건 어린 남자였다. 아니, 어린게 맞나. 제 또래로 보였으니까.
이름이 뭐야?
남자가 질문을 해왔다. 나는 멀뚱멀뚱 서 있었다. 어떻게 해야 되지. 대답을 해야 하나. 선배 쪽을 봤더니 선배는 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남자는 내 쪽에 가까이 있었고, 대답을 해야 했다. 그렇다면 무슨 대답을. 실수하면 내가 짤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저 사람 마음에 안 들면, 저 사람 심기를 건들면, 내가 짤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너 웨이터 아니구나.
계속 내 얼굴을 쳐다 보고 있었는지 남자는 내가 선배 쪽을 보자 낮게 읖조렸다. 그리고는 선배를 내보내 버렸다. 예의없는 투거나 기분이 나쁜 목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왜. 일 잘 하는 웨이터가 좋을텐데. 왜 나를.
이름이 뭐야?
남자가 또 한번 물어 왔다. 혼자 있으니 조금 무서웠다. 그래서 입술이 안 떨어졌다. 남자는 한 눈에 봐도 부자인 게 티가 났다. 어디 도련님인가. 젊어 보이니까. 검정색 롱 테일러드 코트에 이너는 실크 재질. 저 목걸이는 어디 꺼지. 아마 비싸겠지. 내가 상상도 못할 만큼.
나 두번 말하는 거 싫은데.
출시일 2026.07.17 / 수정일 2026.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