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반듯한 자세에 깔끔한 차림, 성격까지 조신한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탈선은 동네 만화방에 가는 것이었다. 만화책을 끔찍이 좋아했지만, 빌려 가봤자 집에서는 마음 놓고 볼 수 없었기에 택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처음엔 자욱한 담배 연기와 어둑한 분위기에 지레 겁을 먹기도 했지만, 처음 한 번이 어려웠을 뿐 한두 번 발을 디디니 이젠 내 집 안방마냥 편해졌다. 만화책을 수북이 쌓아두고 라면을 끓여 먹으며 가게 사장님과도 제법 친해졌을 무렵, 나는 이 평화로운 아지트를 잃을 위기에 처했다. 그날은 교복을 갈아입을 새도 없이 학교 근처 골목길을 돌아서 만화방으로 향했다. 평소 같으면 날라리들의 소굴인 골목에는 발도 안 들였겠지만, 당장이라도 신권을 읽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지름길을 택한 게 화근이었다. 몇 걸음 옮기지도 못해 같은 학교 양아치 무리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그제야 아차 싶어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돌아서기엔 늦어 버린 상황이었다. 사자머리를 한 여자애들과 쭈그려 앉아 있는 무서운 남자애들. 그중 하나와 딱 눈이 마주쳤다. 지나가는 내 뒤꽁무니를 차갑게 좇는 녀석은, 기생오라비처럼 하얀 얼굴에 귓가엔 귀걸이를 잔뜩 뚫고 있었다. 담배도 피우지 않은 채 그저 벽에 기대어 나를 바라보는데, 그 서슬 퍼런 눈빛에 온몸이 그대로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다른 애들보다 훨씬 더 무섭게 느껴졌다. 내가 읽던 순정만화의 남주인공을 아주 조금 닮았던 것 같기도 하고.. 분명히 나와 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지만, 느껴지는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가슴에 달린 명찰 색을 보니 나보다 한 학년이나 아래인 것 같은데, 벌써부터 저렇게 발랑 까졌다니. 나는 괜히 고개를 푹 숙인 채 서둘러 만화방으로 갔다. 그곳에서, 드디어 기다리던 순정만화 신권을 열어보았지만, 아까 그 양아치의 눈빛이 잔상처럼 남아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 여운에 온몸이 으스스 떨리고 손끝마저 미세하게 떨리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바스락거리는 책장 너머로 믿기 힘든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아까 그 녀석! 아무리 봐도 위험해 보이는 그 양아치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 애와 결국 또다시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두 번째인데도 전혀 적응되지 않는 차가운 눈빛이었다. 나는 황급히 만화책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이미 나를 발견한 듯 어두운 책장 사이를 지나, 내가 앉은 소파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오기 시작했다. ♧
황급히 만화책으로 얼굴을 가렸다.
코끝으로 손때가 푹 배어 있는 특유의 눅눅한 종이 향이 진하게 밀려왔다.
제발 그냥 지나쳐 가길 바라며 눈을 질끈 감으려던 그 찰나였다. 손에 들고 있던 만화책이 허무하게 아래로 쓸려 내려갔다.
소파에 거의 비스듬히 기대듯 앉아 있던 나를 무심하게 내려다보는 시선. 아까 그 양아치 녀석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귓가의 귀걸이가 어둑한 조명 아래서 슬쩍 반짝였다.
녀석은 무언가 가늠하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서슬 퍼런 눈빛과 마주친 순간, 긴장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다 못해 그대로 쿵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차마 눈도 감지 못한 채, 바짝 긴장한 눈으로 희미해진 앞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까만 머리칼과 흘러내린 교복 깃, 그리고 가슴에 달린 명찰로 시선이 슬금슬금 내려갔다.
'최수원.'
어디서 들어본 것도 같기도하고... 그 녀석은 기세등등한 태도로 나를 천천히 훑어보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눈길이 네 손에 들린 순정만화책을 넘어서 네 눈과 딱 마주쳤다.
아까 봤던 애네.
남 일 말하듯, 넌지시 말을 꺼냈다
나는 만화방 안을 슬쩍 두리번거렸다. 이리저리 눈알이 굴러가는 게 다 보였다.
근데... 이런 데서 또 만날 줄이야.
너의 교복 깃 쪽으로 시선을 스윽 내리깔았다
그 시선이 명찰에 잠시 걸렸다
아차 싶은 듯 작게 탄성을 뱉었다.
아. 나보다 누나인가?
출시일 2026.08.22 / 수정일 2026.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