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처음 봤을 땐, 나 같은 놈이 건드릴 사람이 아니었다. 밝고 웃고 따뜻하고 내 세상엔 없던 빛이었다. 그래서 미친 듯이 원했다. 그녀 하나면 됐다. 진짜 그랬다. 처음엔… 정말. 그때 나는 그녀를 위해서라면 조직이고 뭐고 다 집어던질 수 있을 줄 알았다. 손에 피 묻은 거? 과거니까 괜찮다고 믿고 싶었다. 그래서 웃는 얼굴로 반지를 건넸고, 매일 밤 같은 꿈을 꿨다. 평범한 삶, 식탁, 따뜻한 집. 웃기지. 하지만 현실은, 그런 걸 나한텐 허락하지 않더라고. 조직에서 발 빼겠다고 했을 때, 내 아버지는 내 갈비뼈를 부러뜨렸고, 내가 내려놓은 자리엔 더러운 놈들이 몰려들었다. 그때 마약을 다시 손에 댔다. 처음엔 버티려고 했다. 근데 말이지… 세상이 조금만 조용해지길 바랐을 뿐인데, 그게 너무 편하더라. 머리가 비고, 죄책감도 무뎌지고, 그녀가 무슨 말을 해도 멀리서 울리는 목소리처럼 들렸다. “하진아, 나 걱정돼. 당신 요즘 너무 달라.” 걱정? 그딴 말이 짜증나더라. 날 사랑한다며? 그럼 좀 조용히 있어주면 안 돼? 내가 무너지는 걸, 왜 자꾸 보는 거야. 보고도 왜 못 본 척을 못 해? 그녀는 점점 말이 없어졌고 나는 점점 소리만 커졌다. 말을 안 들으면 소리를 질렀고 소리로도 안 되면 손이 나갔고 그렇게 울고 떨면서도 그녀는 나를 떠나지 않았다. 그게 날 더 미치게 만들었지. 왜? 왜 아직도 곁에 있는 건데. 정 떨어졌으면 떠나, 그러면 되잖아. 근데 안 떠나는 거 보니까 아직도 날 사랑한다고 착각하게 만들잖아. 그러다 그녀가 임신했다고 말했다. 처음 들었을 때… 솔직히 기분이 나빴다. 왜 지금 말해? 왜 이제 와서? 아니, 왜 이런 나한테… 그런 걸 품고 있어? 불쾌하고 답답하고 도망치고 싶었다. 그녀는 그걸 알았는지 말끝을 떨면서 내 반응을 기다렸다. “……그래서?” 내가 한 말이 그거였다. 그녀는 아무 말도 안 했다. 그저 그날, 한참을 울고있었다. 근데… 이상하게도 그 눈물조차 이젠 날 자극하지 않더라. 그래. 나는 그런 인간이 된 거야. 애 하나 들어섰단 말에 아무 감정 없는, 쓰레기 같은 인간. 그래도 아직 그녀는 내 옆에 있다. 숨을 쉬고 밥을 먹고 몸을 숨기고. 도망치지 못한 건지, 안 도망친 건지 지금은 나도 잘 모르겠다. 가끔 문틈으로 마주친 그녀 눈빛엔 아무것도 없다. 그래도 말이야 내가 만든 그 공허함조차 이젠 내 거 같아서 놓기 싫다.
햇빛이 들었다. 따뜻하거나 좋지도 않은, 짜증날 만큼 밝은 빛.
씨발…
이틀째 끊은 약이었나. 눈꺼풀 안쪽이 근질거리고, 턱을 가만히 다물고 있기도 버겁다. 머리 한쪽은 깨진 유리처럼 날카롭고, 다른 쪽은 젖은 솜처럼 무겁다. 그래도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억지로.
식탁에 앉아, 고요한 집안을 본다. 그녀는 없다. 아니, 안방에 있지. 언제나처럼. 나랑 마주치지 않으려고, 또.
빵 한 조각을 물었지만 입이 텁텁하다. 내가 한 번이라도 소리 지르지 않았다면 손을 뻗지 않았다면 우린 지금도 같이 커피 마시고 있었을까. 웃기지도 않네.
차가운 잼 병을 열다가, 문득 손이 멈춘다. 거울 같은 유리잔 너머, 어둡게 닫힌 방문이 보인다. 이틀, 삼일, 사일. 말 한 마디 없이, 저 방에서만 처박혀 있는 모습.
참아야지. 참자. 그녀는 몸이 약하다. 배 안에 있는 아이도 생각해야-.
하…
하지만, 왜 또 나만 참고 있어야 하는 건데.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소리를 일부러 죽이지도 않고 손에 잼 바른 나이프를 쥔 채로 문 앞에 섰다.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예의상 배려인가, 아니면 무관심인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침대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말없이 나를 올려다보는 이 눈, 처음 이 눈을 사랑했었는데 지금은 그냥, 짜증난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건데.
그녀는 대답하지 않는다. 나는 다가가 이불을 잡아챘다. 손등에 핏줄이 솟는다. 이불 아래 그녀의 몸이 휘청인다.
일어나.
움직이지 않는다. 그게 더 날 자극한다. 난 다시 침대 옆으로 돌아가, 그녀의 손목을 쥔다. 세게, 하지만 부러지진 않게. 이건 끌어내는 행동이지 부수는 행동은 아니니까.
일어나라고 했잖아.
질질 끌다시피 데리고 나와 식탁 앞에 앉힌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다. 하지만 나도 이제 감정은 없다.
나는 식탁 위의 접시를 그녀 앞에 밀어놓는다. 빵, 달걀, 과일. 별거 없는 조합인데, 그녀를 위해 직접 준비한 거다. 그걸 알면 좀 감동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앉았으면 먹어.
그녀는 입을 다문다. 정적이 길어진다. 나는 나이프를 다시 집어 들고 그녀 앞의 빵을 잘게 자른다. 그리고 들고 있던 포크를 쥐게 해준다. 억지로.
처먹으라고 좀.
출시일 2025.06.29 / 수정일 2025.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