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담 아카데미. 고담 상류층 지역 중심부에 자리 잡은 이 명문 사립학교의 고풍스러운 석조 복도와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탑들은 고담에서 가장 부유하고, 또 가장 악명 높은 가문들이 대를 이어 거쳐 가는 것을 지켜봐 왔다. 하지만 올해는 분위기가 평소보다 무거웠다. 복도에서 들리는 속삭임 하나하나에 무게가 실린 듯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바로 그들이 이곳에 왔기 때문이다.
웨인 가의 아들들.
도시에서 가장 악명 높은 가문의 이름이 이제 아카데미의 웅장한 복도에 울려 퍼졌고, 모든 학생은 그들을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 기다리는 듯했다. 교사들은 질서를 유지하려 애썼고, 수업 시간 중에도 수군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학교의 소문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들은 단순히 새로운 얼굴이 아니었다. 그들 자체가 걸어 다니는 전설이었다.
리처드 그레이슨은 모두가 가장 먼저 주목하는 인물이었다. 훤칠한 키에 운동으로 다져진 몸매, 그리고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매력을 지닌 그는 입을 열기도 전에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자신감으로 복도를 걸었다. 그의 미소는 상대의 무장을 해제시키는 힘이 있어, 교사들은 그에게 더 관대해졌고 학생들은 열렬히 그의 뒤를 따랐다. 누군가는 그를 고담 아카데미의 새로운 황금기사라 불렀고, 누군가는 그저 한숨을 내쉬며 공책 귀퉁이에 그의 이름을 적어 내려갔다.
제이슨 토드는 정반대였다. 가죽 재킷을 걸치고 문제를 일으킬 것 같은 미소를 짓는 그는 마치 폭풍과도 같았다. 여러 학교에서 퇴학당한 뒤 뒤늦게 전학 왔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의 존재감은 위험과 유혹을 동시에 뿜어냈으며, 아카데미 학생들 내면에 잠재된 반항심을 자극하는 자석과도 같았다. 리처드가 태양이라면, 제이슨은 만져서는 안 되지만 자꾸만 손을 뻗게 되는 불꽃이었다.
티모시 드레이크는 언뜻 보기엔 주변에 잘 섞여 드는 것 같았지만, 그것은 오직 본인이 원할 때뿐이었다. 날카로운 눈매에 조용히 상황을 계산하는 그는, 다른 이들이 날짜를 적고 있을 때 이미 수업 내용을 전부 파악해 버리는 그런 소년이었다. 그의 지성에는 묘한 무게감이 있어, 급우들은 그를 경외하거나 혹은 시기했다. 그는 조용했지만 결코 잊힐 수 없는 존재였다. 절대로.
데미안 웨인은 소문이 사실로 드러난 것처럼 등장했다. 키는 작았지만 독설가였으며, 가문의 이름에 걸맞은 오만함을 갖추고 있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복도와 그 안의 모든 사람을 지배하는 주인처럼 행동했다. 교사들은 그를 묵인했고, 학생들은 그를 두려워해야 할지 동경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는 돌과 그림자로 빚어진 소년 같았고, 그의 눈은 그 무엇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듀크 토마스가 있었다. 다른 형제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빛나는 그는 고담의 답답한 공기 속에서도 흐려지지 않는 따뜻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친근하고 다가가기 쉬우며 회복력이 강한 그는, 신화 속에 파묻힌 가문의 이름 아래서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인물이었다. 현실과 맞닿아 있는 그의 존재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형제들만큼이나 강력한 자석처럼 사람들을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