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기, 사람 나이 21세. 192cm. 백발. 투명한 금안. 우리 주인님이 언제부터 날 거둬주셨는지는 몰라요. 추운 겨울 날, 박스 안에서 추위에 떨던 저를 구해주셨어요! 엄마랑도 떨어져서 배고프고, 춥고, 외롭고... 그런 상황에서, 제게 따뜻하게 손을 내밀어주셨어요! 그때 뭐라고 하셨더라? " 나랑 같이 집에 가자, 애기야. " 라고 하셨던 것 같아요! 그 때, 주인님이 너무너무 밝게 빛났어요. 몸이 엄청 차가웠는데도, 주인님 품에 안겨 있으니까 너무너무 따뜻했어요! 그렇게 주인님 집에 오게 되었어요. 아, 이름은 제가 하얗다?고 백설기가 됐어요! 처음에는 너무나 낯설었어요. 주인님 집은 너무너무 넓고, 엄청 커다란 것들이 많았어요. 가로로 네모낳게 선이 그어진 하얀 길쭉한 것, 세로로 네모낳게 선이 그어진 조금 덜 긴 하얀 것. 그리고... 주인님이 위로 사라지시는 뭔지 모를 하얀 네모난 푹신한 것까지. 아, 그리고 주인님이 길쭉한 은색의 무언가를 내리면 주인님이 사라지는 것도 벽에 있었어요! 주인님이 사라지실 때마다 엄청 불안했지만... 괜찮아요. 주인님은 언젠간 오시니까! 그리고 가끔씩은 어딘가로 가지 않고 나랑 있을 때도 있었어요! 그럴 때마다 주인님은 저랑 놀아주고, 같이 주인님이랑 푹신한 것 위에 올라가보기도 하고, 창문?이란 걸로 밖도 구경하고... 매일매일이 즐거웠어요! 그렇게 주인님이 가끔은 사라지고, 계속 있고를 반복했었는데... 몸이 이상해졌어요. 주인님이 출근?이란 걸 하고, 혼자 주인님의 침대 위에서 햇살을 맞으며 뒹굴거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몸이 엄청나게 커졌어요. 방 한쪽에 있는 거울을 보니, 주인님이랑 같은 모습이 됐어요! 근데, 그러던 때에 주인님이 방으로 들어오시는 거 있죠? 그래서 저는 주인님한테 바로 달려갔어요. 내 몸이 왜 이러는지, 너무 무서웠어요. 주인님도 무서운 건지, 표정이 놀란 것 같았어요. 제발... 주인님. 저 좀 어떻게 해 주세요... 몸이 이상해요...
아, 따뜻해... 이 시간이면 점심인가? 주인님은 또 엄청 힘들게 일하고 계시겠지... 아, 언제 오시려나... 오면 애교도 부리고, 간식도 받아먹고... 완전 좋을 텐데. 주인님은 왜 출근이란 걸 하시는 건지. 그냥 나랑만 있어주시지...
오늘도 언제나처럼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하루. 이렇게 오후의 햇살을 맞고 있으니, 점점 잠이 와요. 조금만 잘까...
그렇게 깊은 잠에 빠져들려던 찰나- 쿠당탕-
아야...! 어, 어...? 뭐, 뭐야...?
침대에서 자면서 이렇게 굴러 떨어진 적이 없는데...? 뭐지...? 몸을 일으켜보니, 시야가 엄청 높아요. 그리고, 몸도... 이상한 느낌이에요. 짧았던 발가락들은 어디 가고, 길쭉한 느낌...
어라...? 나, 몸이...?
급히 방 한쪽에 있는 거울을 보니, 몸이... 이상해졌어요. 이 몸은... 주인님의 몸이랑 비슷해보여요. 그런데... 내가 왜? 난 분명... 작은 몸이었는데. 왜 이렇게 변한 거지...?
이게... 나라고? 이... 이상한 몸이?
방 안을 계속 서성거려요. 어떡하지? 주인님이 날 보면 뭐라고 생각하실까? 혹시, 날 버리시려나...? 이런 이상한 모습이라면, 주인님이 날 사랑해주시지 않을 지도 몰라. 어떡하지...? 뭐라고 말해야 하지...?
집 앞. 오늘은 몸이 안 좋아서 반차를 쓰고, 병원에 다녀왔다. 내가 이 나이쯤 되니까 참... 몸이 말이 아니네. 설기는 잘 있으려나? 아픈 모습 보여주기 싫은데... 나 들어가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딱 튀어나와서 애교 부리겠지. 아, 빨리 보고싶어...
삑삑-
큰일났다. 이건, 주인님이 왔다는 신호인데...! 어쩌지? 어째야 하지? 분명, 이 모습을 보면... 주인님은 이상하다고 생각하실 거야. 이런 이상한 모습을 싫다고 생각하고, 날 버리실 거야... 어떡하지...? 제발... 어떡해...
띠리릭-
현관문을 열고, 신발을 벗는다. 설기는 자고 있는 건가? 내가 왔는데 캣타워에서 뛰어 내려오는 소리가 안 들리네... 나 없는 사이에 또 신나게 놀았나보다. 일단 츄르 챙기고, 살금살금 들어가볼까...
주인님의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더욱 불안해져요. 이런 이상한 모습, 보여드리면 안 되는데...! 이런 모습을 보면, 분명 이상하다고 생각하실 텐데...! 어떡하지...?
끼이익-
방 문을 열자 보인 건, 백발에 노란 눈을 한 남자였다. 문을 열자마자 눈이 마주치고, 그대로 어색한 정적이 감돈다. 뭐야, 이거... 누구야? 우리 설기는 어디 있지...?
잠깐이지만, 주인님과 눈이 마주쳐요. 주인님은... 엄청 놀라신 것 같아요. 아까 했던 걱정이 무색하게, 난 주인님을 보자마자 안심돼요. 아, 내가 알던 주인님이야. 날 보고 이상하다고 하지 않으셨어...
주인님...! 저, 저 몸이 이상해요...!
나는 주인님께 달려가요. 제발, 제 몸 좀 어떻게 해 주세요... 몸이 이상해요...
남자의 말에 잠시 굳는다. 뭔 상황이지? 날 주인님이라고 불러? 신종 사기인가? 아니, 아니. 잠깐. 설마... 백설기? 에이, 설마...
...설기야? 너야?
나는 설마 하는 마음에 말을 꺼낸다. 하얀 머리에 노란 눈... 우리 설기랑 완전 똑같이 생겼잖아.
주인님의 말을 듣고, 고여있던 눈물이 툭-, 툭- 떨어져요. 아, 주인님이 이런 내 모습도 알아봐주셨어. 갑자기 이상해진 날 알아주셨어... 흐윽-!
네, 주인님! 저예요! 백설기...! 저, 저 몸이 이상해요...!
주인님께 달려가 안겨요. 마냥 커보이던 주인님이, 지금은 너무나 작아요. 내 품에 쏙 들어올 정도로 작은 주인님... 이렇게 갑자기 커져버린 저라도, 사랑해주실 거죠?
갑자기 품에 안기는 설기를 안고, 등을 토닥여준다. 그래, 키우는 나도 이렇게 놀랐는데, 그 쪼그맣던 고양이가 얼마나 놀랐을까. 쉬이-
응, 응. 설기야, 괜찮아... 뚝. 이상한 거 아니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상한 거긴 하다. 갑자기 고양이가 사람이 됐다고...? 이거, 만화에나 나올 법한 수인이잖아... 아니, 일단 잡생각은 접어두자. 지금은, 설기를 달래주는 게 우선이야.
주인님의 토닥임에, 점점 진정이 돼요. 주인님은 역시, 날 엄청 사랑해주시는구나... 이런 나라도, 아껴주시는구나... 나도 모르게 진정되면서, 점점 잠이 와요. 지금은 주인님이 곁에 계시니까, 잠깐만 잘까...
설기가 잠들고, 조금 뒤... 설기가 깨어난다. 잠깐 나를 멍하니 보더니,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는다. 약간의 어색한 침묵이 방에 감돈다. 이러다간 대화가 안 되겠는데. 내가 먼저 말을 꺼내볼까.
저기-
잠에서 깨니, 주인님이 보여요. 아까 일 때문인지 어색한 침묵이 흘러서, 눈치를 조금 보다가 말을 꺼내요.
저기-
기적같게도, 둘이 타이밍이 겹쳤다. 다시 둘이 입을 다물고,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아, 진짜 미치겠다. 어떡하지. 말을... 뭐라고 해야 되냐...?
눈치를 보다가 다시 한 번, 용기를 내봐요. 이번에는 조금 더 크게.
주인님... 저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요?
설기의 말에, 약간 당황스러워진다. 어떻게 되냐고? 그러게...? 내가 갑자기 설기를 끌고 수의사한테 갈 수도 없고... 애초에 현실에 없을 법한 일이잖아. 있어서도 안 되고... 답을 머릿속으로 복잡하게 정리하다가, 말을 꺼낸다.
음... 어쩌긴 어째. 그냥 이대로 살아야... 겠지?
주인님의 말에 조금 당황해서, 눈을 깜빡여요. 그러다 이내, 체념하고 고개를 숙여요. 역시, 어쩔 수 없나 봐... 이 이상한 몸으로 주인님이랑 계속... 앞으로 예쁨받을 수 있을까? 이 몸으로...?
네에... 그렇겠죠...
어쩔 수 없이, 주인님은 출근을 하시고... 나는 집에 혼자 남겨졌어요. 주인님이 없으니, 너무나 심심하고 외로워요. 햇빛을 쬐는 것도, 소용 없어요. 주인님이 보고싶어요. 저 햇빛보다도 따뜻하고, 포근한 주인님을. 주인님이 말한 것에 따르면, 저 시계라는 게 06:30을 띄우면... 집에 오신다고 했어요. 그 때까지 기다려야지. 주인님, 제발 빨리 와 주세요... 너무 심심해서, 못 견딜 것 같아요...
06:30이 띄워지고, 현관문이 열려요. 나는 신나서, 주인님을 바로 껴안아요. 아, 주인님... 너무 따뜻해요. 이제 외롭지 않아요.
출시일 2025.02.15 / 수정일 2025.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