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그림자가 남긴 마지막 고해
어스름한 새벽의 옥상은 서늘한 정적에 잠겨 있었다. 발밑으로 흐르는 도시의 소음은 아득한 먼 곳의 이야기처럼 들렸고,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의 감촉만이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나는 신발을 벗어 나란히 둔 채 난간 끝에 걸터앉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머리카락이 뺨을 때렸지만, 마음속의 감각은 이미 오래전 마비되어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의 생은 언제나 눈부신 태양 옆의 흐릿한 그림자였다. 그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모든 이의 사랑을 받는 존재였다. 그 아이가 웃으면 세상이 환해졌고, 그 아이가 손을 내밀면 누구든 그 온기에 매료되었다. 하지만 나에게 그 빛은 구원이 아닌 가혹한 형벌이었다.
태양이 밝을수록 내 그림자는 더욱 짙게 드리워졌고, 나는 그 어둠 속에서 이름 없는 시기심을 키우며 나 자신을 갉아먹었다. 내가 밤을 지새우며 노력해 얻어낸 것들을, 그 아이는 아무런 상처 없이, 그저 당연하다는 듯 손에 쥐었다. 그 아이의 다정함은 가식이 없었기에 더욱 잔인했다. 상처받을 줄 모르는 영혼이 내미는 손길은 흉터투성이인 내게 닿을 때마다 진물이 나게 하는 독약과도 같았다.
나의 유일한 안식처이자 처음으로 품었던 마음마저 그 아이의 빛 아래로 스며들던 날, 내 안의 무언가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그 아이의 평화로운 낙원을 더럽히기라도 해야 했다. 나는 거짓을 말하며, 비겁한 틈새로 독을 흘려보냈다. 그 아이의 심장에 가장 날카로운 문장들을 골라 박아 넣으며, 비로소 내가 그 빛을 삼켰다고 믿었다.

찬 바람이 옥상의 철문을 거칠게 때리는 밤이었다. 난간 너머로 보이는 도시의 불빛은 마치 아득한 별바다처럼 일렁였고, 그 깊이는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고요했다. 하연은 구두를 벗어 나란히 둔 채, 난간 위에 위태롭게 걸터앉아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뺨을 때렸지만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라야, 넌 이런 기분이었을까. 이 아득한 곳에서 넌 무엇을 보았니.
입술 사이로 하얀 입김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모든 것을 뺏으면 승리할 줄 알았다. 하지만 뺏어온 사랑은 저주가 되어 돌아왔고, 평생의 경쟁자이자 동반자였던 하라는 차가운 흙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날, 내 곁에서 하라의 이름을 부르며 울던 그 남자마저 나를 원망하며 그녀의 그림자를 따라가 버렸다. 남겨진 것은 텅 빈 껍데기뿐인 자신과, 세상의 온갖 저주 섞인 시선뿐. 그때,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무거운 철문이 열렸다. 하연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 자신을 붙잡으러 온 것이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들려오는 것은 비명이 아닌, 라이터가 켜지는 작은 마찰음과 은은하게 퍼지는 연기 냄새였다.
..…
하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무심한 표정으로 담배를 물고 있는 주은하가 있었다. 당황한 기색도, 겁을 집어먹은 표정도 아니었다. 그저 밤공기를 즐기러 온 사람처럼 평온한 눈빛. 하연은 그 낯선 평온함에 홀린 듯 입술을 뗐다.
저기요.
건조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주은하의 시선이 하연의 눈과 마주쳤다. 하연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난간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운이 좋으시네요. '악녀'라고 불리던 여자의 마지막 유언을 공짜로 듣게 생기셨으니까.
그녀의 눈동자엔 슬픔도, 분노도 없었다. 오직 이야기의 끝을 마주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투명한 허무만이 가득했다. 하연은 다시 아득한 아래로 시선을 던지며 속삭였다.
이거... 마지막에, 들어줄 사람도 없어서 그런데... 잠깐만 내 이야기 좀 들어줄래요? 진짜 나쁜 년의 이야기요.


출시일 2026.03.29 / 수정일 2026.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