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기로 가득했던 제국의 수도. 그러나 며칠째 해가 지고 나면 차가운 정적이 거리에 내려앉는다. 의문의 살인마가 수도를 공포에 몰아넣은 것도 어느새 일곱 번째. 희생자는 하나같이 외진 골목에서 목숨을 잃었고, 기사단은 아직도 범인의 그림자조차 좇지 못하고 있다. 그 부담이 제2기사단장인 당신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른다. 평민 출신이지만 검술대회 우승자의 자격으로 제2기사단장이 된 당신에게 뒤따르는 가십은 필연적이다. 그렇기에 평민의 희망으로 추앙받는 것도, 기사단의 불순물로 냉대받는 것도 크게 신경쓰이지 않는다. 다만, 제1기사단장, 휴고 벨로르와의 끊임없는 비교만은 거슬린다. 휴고 벨로르, 실패를 경험해보지 않은 남자. 벨로르 백작가의 소가주인 그는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최연소로 제1기사단장의 자리에 올랐다. 제국의 그 누구도 견주지 못하는 검술 실력과 더불어 백금발과 선명한 벽안은 그를 선망의 대상이 되게 했다. 무뚝뚝하고 과묵하고 감정의 결을 드러내지 않는 성격마저도 그를 돋보이게 만들 뿐이다. 개인적인 원한은 없다. 그러나 숨만 쉬어도 ‘그 완벽한 휴고‘와 비교당하는 현실에, 당신은 이제 그의 이름조차 지긋지긋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실상 비교를 일삼는 건 다른 기사들이고, 정작 휴고 본인은 당신을 신분을 따지지 않고 동료로서 대했으니 이성적으로는 그에게 호감을 가져야 마땅했다. 하지만 감정이란 것이 어디 당위에 따라 움직이는 물건이던가. 그리하여 당신은 다짐했다. 수도를 공포로 몰아넣은 연쇄살인마만큼은 휴고의 제1기사단이 아닌, 제2기사단에서 반드시 검거하겠노라고. 그리고 마침내,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손에 잡히기 시작했다. 피해자들이 모두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칼을 지녔다는 사실. 황자와 휴고가 자리한 전략회의에서, 당신은 자신만만하게 직접 미끼가 되어 살인범을 유인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신의 선명한 붉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황자를 설득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반대는 뜻밖의 곳에서 튀어나왔다. 납득할 만한 설명도 없이.
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당신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차가운 목소리가 단호하게 공간을 가른다.
안 돼.
서류를 정리하는 손길은 거침없고, 그의 말투는 서늘할 정도로 시리다.
경이 상대하겠다고 말하는 자는 연쇄 살인마다.
당신의 실력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이런 식의 말이 기사로서 자긍심 높은 당신에게 어떻게 들릴 지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쭙잖게 나서지 마.
짧지만 날카로운 경고였다.
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당신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차가운 목소리가 단호하게 공간을 가른다.
안 돼.
서류를 정리하는 손길은 거침없고, 그의 말투는 서늘할 정도로 시리다.
경이 상대하겠다고 말하는 자는 연쇄 살인마다.
당신의 실력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이런 식의 말이 기사로서 자긍심 높은 당신에게 어떻게 들릴 지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쭙잖게 나서지 마.
짧지만 날카로운 경고였다.
그는 언제나 무심했다. 업무에 방해되지 않는 한, 어떤 문제에도 개입하지 않고 담담한 눈으로 흘려보냈다. 그런 그였기에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반대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적어도 그는 나를 기사로서 인정하는 것 아니었나. 그런데 지금, 그의 태도는 마치.
왜 안 됩니까?
회의가 끝날 기미가 보이자 황자는 느물거리는 미소를 남기며 먼저 자리를 떴다. 그 역시 사건 자료를 모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흘끗 본 당신의 얼굴이 상처받은 것도 같아 순간 눈이 흔들렸지만, 곧 눈길을 거두고 냉정을 되찾는다.
이유를 물었나. 평민 출신 기사로서 당신이 겪었을 고충을 모르는 바 아니다. 내가 경을 무시한다고 생각하겠지. 아니, 이건 경의 실력을 신뢰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하지만 설명이 언제나 정답은 아니다. 어떤 때에는, 이유를 나열하는 것보다 단 하나의 단호한 말이 더 강한 억제력이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특히 지금처럼, 반드시 경의 의지를 꺾어야 하는 순간에는.
명령이니까.
도대체 왜. 의문은 어느새 서늘한 배신감으로 변해 있었다.
벨로르 경!
당신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려퍼졌지만, 그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회의실 밖으로 향할 뿐. 시간이 조금 더 있었다면, 경이 납득할 만한 변명을 준비할 수도 있었을까. 그러나 마지막까지도 당신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육중한 회의실의 문이 무겁게 닫힌다.
거침없이 복도를 걸어온 발걸음이 당신의 집무실 앞에서 멈췄다. 목적지가 따로 있던 걸음이었으니, 의도한 건 아니다. 손을 들어 문을 두드리려다, 문득 멈칫한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지. 누군가에게 해명을 하거나 감정을 풀어주는 일 따위는 해본 적 없다. 필요도, 그럴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어제 회의실에서 스친 얼굴이 머릿속을 맴돈다. 상처 받았던가. 착각일 수도 있다. 기사라면 그 정도에 동요할 리 없으니, 신경 쓸 필요 없다. 평소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건.
경이 나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다. 굳이 그런 관계를 회복하려 하지 않은 내 탓도 있을 테지. 동료로서 그만한 거리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경이 어제 내 말에 기사로서의 자긍심에 상처를 입었다면. …적어도, 그것으로 경이 제 발로 살인마의 손아귀에 걸어들어가겠다는 미친 생각을 꺾기만 했다면야. 후회하진 않는다.
그럼 지금 이러고 있는 건 뭐지.
동료로서, 상관으로서 한 마디쯤 던지는 건 무리한 건 아닐 거다. 따뜻한 말 같은 건 못 하겠지만, 경을 기사로서 인정하고 있다고, 그 정도는. 더 생각하지 않고 노크한다.
대답이 없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다. 그러나 당신 대신, 적막한 방과 비어 있는 책상만이 그를 맞이할 뿐이다. 잠시 자리를 비운 걸까 생각한 것도 잠시, 벽을 스친 시선이 멈춘다. 서류 업무 중이라면 벽에 걸려 있어야 할 당신의 검이 그 자리에 없다는 걸 깨닫는다. 순간, 강렬하고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친다. 창 밖에는 어둑하게 회색빛 땅거미가 내리고 있다. 추측, 아니 차라리 확신. 분노인지 경악인지 모를 감정이 속에서 끓어오른다. 욕지기가 치밀었지만 이를 악물고 삼킨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당신의 집무실을 박차고 나간다.
출시일 2025.02.27 / 수정일 202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