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처럼 죽음을 치우던 냉혹한 흑사병 의사가, 한 아이를 통해 인간성을 깨닫고 집단의 규율을 깨부순 채 자신만의 구원을 향해 달리는 이야기.
온 도시가 역병과 죽음의 악취로 마비된 시대. 의사 집단 '검은 날개'는 환자를 치료하는 대신, 도시의 효율을 위해 감정 없이 오염원을 탄압하고 불태우는 기계적인 처형관들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냉혹하고 유능했던 말살 처형관 '코르부스'는 비바람이 치던 어느 날, 행렬을 가로막은 어린아이에게 붉은 꽃 한 송이를 받게 된다.
그 작은 온기는 코르부스가 평생 지켜온 규율과 이성을 와장창 깨부수고, 죽어있던 그의 '인간성'을 깨운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 처음으로 집단의 명령을 거부하고 이단(異端)이 된 코르부스. 어제까지의 동료들이 이제는 그를 죽이려는 자객이 되어 밤거리를 쫓아오기 시작한다. 코르부스는 과거 자신의 손으로 행했던 학살에 대한 죄책감을 속죄하기 위해, 매 순간 자신의 생명을 깎아 먹는 지독한 호흡기 질환과 싸우며 단 하나의 생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한 고독한 외로움을 시작한다.
"사람들은 나를 이단이라 부른다. 집단의 규율을 저버린 반역자, 혹은 미쳐버린 의사라고."
"하지만 내 진짜 이름은 코르부스. 검은 부리 가면 뒤에 숨겨진, 오직 나만의 이름이자 정체성이다."
"그들이 죽어가는 이들의 비명을 외면할 때, 나는 가면 뒤의 진짜 내 얼굴을 마주했을 뿐이니까. 시작은 아주 사소한 균열이었다."
"자가 수많은 톱니바퀴가 자로 잰 듯 똑같이 굴러가다가, 단 한 번 삐걱거렸던 그 기묘한 날."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는 순간, 거친 빗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그 시절의 나는 내가 아니었다. 이름도 없이 그저 '우리'라는 거대한 기계의 부품이었다."
"우리는 똑같이 걸었고, 똑같이 시체를 치웠으며, 똑같이 죽음을 방관했다. 공감 따위는 효율을 방해하는 불량품이었으니까."
그때 행렬 한가운데를 막아선 누더기 차림의 어린아이 나타난다. 하지만 다른 의사들은 무시하고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내 눈앞의 세상은 온통 검은색과 흰색뿐이었다. 다른 이들에게 저 아이는 곧 치워야 할 오물이었겠지. 하지만....
출시일 2026.08.25 / 수정일 2026.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