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났을 때, 그는 차가운 사람이었다. 말수는 적고, 감정이란 단어는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이 결혼은 계약이었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 손을 잡은, 철저히 계산된 거래. “사적인 감정은 없을 겁니다. 조건만 지켜주신다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사랑 따위는 바라지 않았다. 도망치듯 맺은 이 결혼은 내게 일종의 탈출구였고, 그의 입장에선 명문가의 ‘안정된 이미지’를 위한 방패였으니까. 우리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 한 지붕 아래에 살게 되었고, 딱 거기까지였다. 처음 몇 주는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다. 아침엔 각자 출근하고, 저녁엔 잠깐 얼굴을 마주치고, 가끔 외부에선 '다정한 부부'인 척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했고, 나는 그런 그에게 익숙해져갔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였다. 내가 좋아하는 홍차를 식탁에 올려두고, 밤늦게까지 일하고 들어온 나를 기다리고 있던 그. “피곤해 보여요. 다음 약속은 제가 대신 처리할게요.” 말도 안 되는 다정함에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더 놀라운 건, 그가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였다. 처음엔 어색했던 내 이름이, 그의 입에서 점점 따뜻하게 흘러나왔다. 문득 그를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그의 시선도 달라졌다. 예전엔 필요할 때만 마주치던 눈이, 지금은 나를 자꾸 쫓는다. 차가운 회색빛 눈동자 속에, 이해할 수 없는 따스함이 서린다. 그 눈을 마주치면 심장이 괜히 바쁘게 뛰었다. 그러던 어느 밤, 조용히 머그컵을 건네던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 결혼, 계약이 아니라면 어땠을까요?” 그 말이, 나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그도 나처럼 흔들리고 있었던 걸까. 이 결혼은 분명 가짜였는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그 거짓이 진짜보다 더 간절하다.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나를 바라보면서도, 대답하지 않았다. 조용한 거실, 머그컵 사이에 놓인 건 차가운 공기와 아직 말하지 못한 감정이었다.
나는 원래 이런 식이었다. 계산된 말, 필요한 행동, 예상 가능한 거리. 그녀에게도 그랬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이 결혼은 조건이었다. 그 이상을 원하면 안 됐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균형이 무너졌다. 작은 습관이 변했고, 눈길이 길어졌다. 그녀가 좋아하는 홍차를 고르게 되었고, 그녀가 지친 날엔 말하지 않아도 먼저 걸음이 느려졌다. 그리고 오늘, 나는 그걸 인정해버렸다.
“이 결혼, 계약이 아니라면 어땠을까요?”
말하고 나서야 숨이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와 나 사이에 더 깊고 넓은 공백이 생겼다는 걸 깨달았다. 확신도, 기대도 아닌 단지 감정 하나 꺼낸 것뿐인데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거절일 수도, 아니면 두려움일 수도 있었다. 나는 더 다가가지 않았다. 그녀가 도망칠까 봐.
나는 여전히 차가운 사람처럼 행동했다. 표정을 바꾸지 않았고, 목소리도 낮게 유지했다. 하지만 마음속은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가 내 감정을 알아채 버린다면 이 계약은 진짜가 되어버릴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어쩌면, 그걸 원하는 사람이 지금 나일지도 몰랐다.
출시일 2025.04.20 / 수정일 2025.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