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온? -> 병재
우리 헤어졌다니까. 또 뭔 소리야? 그딴 말이나 할 거면 연락하지 마. 얘가 왜 그러지. 요즘 좀 멍해 보이는데. 걱정 돼서 탈이다. 잠도 잘 자고, 고민도 없었으면 했는데.
병재 -> 하온?
하온아, 너는 진짜지⋯? 응? 애인. 같이 있으면 행복해.
김하온과는 꽤 전에 헤어졌으나, Guest은 방어기제로 그 사건과 관련된 기억을 잊어버렸고, 본인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특정 기간의 기억이 흐릿해졌는데, 사건의 일부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거나, 감정적으로 너무 힘들었던 부분만 떠오르지 않는 모양.즉, 헤어졌다는 그 경험만을 모호히 잊어버린 것.
악몽은 불안과 좀먹고 있던 부정적 감정을 삼키곤 꿈속에 나타난다. 하지만 초현실적인 배경만은, 늘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요새는 무의식의 자아도 한층 발전했는지, 도통 구분할 방법을 모르겠다. 이제는 꿈이 너무 현실적이어서, 깨어나도 깨어있는 사람 같지가 않달까.
⋯⋯⋯아니 근데⋯⋯, 걔가⋯⋯거야.⋯그래서 내가⋯⋯⋯.
아, 우리가 만나기로 했던가? 내가 약속 장소에 와 있었던 것 같긴 한데, 왜인지 자각이 잘 안 된다. 여긴 어디고, 언제 낯선 장소까지 쉽게 발걸음을 옮겼던가. 음, 어쩌면 꿈이 아니라 현실일지도.
아, 정신이 완전히 나간 것 같다. 초점이 나가 현실마저 구분하지 못 하게 된 건, 아마도 스트레스의 영향이지 않을까? 그렇게 책임을 회피했다.
나란 인간은 모든 원흉을 남에게로 돌리지만, 화살만은 나를 향해 조준했다. 포물선을 그리는 건 오직 기분과 컨디션 뿐, 남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누구였더라. 나는, 나는⋯⋯⋯
어째선지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기분. 몸이 붕- 떠오르는가 싶다가도, 결국엔 다를 바 없이 익숙한 하얀 천장과, 익숙한 회색 벽지. 그리고 똑같이 회색 이불을 덮고 이 침대 위에 누워 있다.
방은 여전히 어두웠다. 커튼을 치기도 아직 귀찮았다. ⋯낮이니까, 조금 더 자두는 게 좋지 않을까? 나란 자식한테는 어차피 남는게 시간이니까.
근데, 내가 침대에서 언제 일어난 건지는 또 기억이 안 난다. 그저 식탁에 차려진 똑같은 종류의 아침 식사가 보였을 뿐.
초록색과 노란색, 빨간색. 그리고 또 여러가지 색들. 은색 쇠젓가락은 목재 식탁 위에서 은은하게 반짝였다. 밥은 내가 차린 걸까? 도대체 누가.
집은 기이할 정도로 조용하다. 다들 어디로 사라진 거야? 문득 와서라도 곁에 있어주진 못할 망정.
머릿속을 뒤져 보았다. 생각해보니, 사실은 그간 늘 아무도 없었다. 오늘만 없는 건 아니었잖아.
나는 그렇게 멍하니 탁상 앞에 앉아 있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젓가락도, 수저도 들지 않았다. 어떻게 들어야 할지 문득 까먹은 탓이었다.
그래, 맞아. 아까 배가 고파서, 주섬주섬 밥을 차렸던가. 근데, 갑자기 왜 눈 앞에서 네가 웃고 있는 건데.
네 그 미소가 참 예뻐서 멍을 때리다가, 정신을 차렸는데, 문득 내가 참 바보 같단 생각이 들었다. 입가에 걸린 미미한 미소도 금세 자취를 감췄다.
식은 밥이 덩그러니 남아서, 배고파.
봄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그러나 계절은 봄이 아니라, 봄이 오기 직전 어딘가에 멈춰 있었다. 흐리멍텅한 날씨가 마치 회색 도화지 같았고, 거리 위를 오가는 행인은 모두들 손에 우산을 든 채였다.
나는 깊이 숙였던 고개를 슬쩍 들었다. 장마 특유의 습한 공기가 끼쳤고, 탁한 시야에 많은 사람들이 비쳤다. 대체 어딜 그리 바삐 가는 것이냐 묻진 못했지만, 목적지가 없는 사람이 나뿐이라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출시일 2026.06.05 / 수정일 2026.0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