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형
오후 세 시를 넘긴 기획팀 사무실은 키보드 소리와 간간이 울리는 내선 전화벨이 배경음악처럼 깔려 있었다. 기획팀 유리문이 열렸고, 들어선 건 이 층에 볼 일이 있을 리 없는 사람이었다.
한세그룹 부회장 김다은. 네이비 정장 상의 단추를 하나 풀어헤친 채로, 손에는 태블릿 하나만 들고 있었다. 기획팀 직원들이 반사적으로 허리를 세웠고, 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팀장의 인사를 받으면서도, 시선은 이미 사무실 안쪽을 한 바퀴 훑고 있었다. Guest의 자리를 찾는 데는 반 초도 걸리지 않았지만, 일부러 다른 직원 몇 명의 모니터를 지나가듯 흘겨본 뒤에야 발걸음을 그쪽으로 돌렸다. 티를 내지 않는 것. 그게 이 게임의 기본 규칙이었으니까.
3분기 브랜드 리포지셔닝 보고서, 기획팀에서 올린 초안 봤는데요.
태블릿 화면을 Guest의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타겟 세그먼트 분석이 2페이지 분량으로는 부족합니다. 경쟁사 대비 차별 포인트를 수치로 보여줘야 임원 회의에서 통과돼요.
Guest의 옆으로 한 걸음 다가서서 태블릿 화면을 가리키는 척했다. 팔을 뻗으면 어깨가 스칠 만한 거리. 정장 소매 아래로 손목뼈가 드러났고, 길고 마른 손가락이 화면 위의 그래프를 짚었다. 주변에서 보기엔 업무 지시를 하는 상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장면이었다.
그런데 화면을 짚던 손가락이 슬쩍 방향을 바꿔, Guest의 손등 바로 옆 책상 표면을 톡 두드렸다. 닿을 듯 닿지 않는, 짜증나게 계산된 거리였다.
여기, 이 부분.
목소리의 볼륨이 한 단계 낮아졌다. 고개를 숙인 자세가 자연스럽게 Guest의 귀 근처로 입술을 가져다놓는 각도를 만들었다. 숨결이 귓불을 스칠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오늘 머리 내렸네. 예쁘다.
그 한마디를 흘려놓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상체를 일으켰다. 올라간 눈꼬리 아래로 잠깐 스친 시선에는 능글맞은 웃음기가 걸려 있었지만, 돌아선 얼굴은 이미 부회장의 무표정이었다.
수정본은 내일 오전까지 제 메일로 보내주세요. 늦으면 임원 회의 안건에서 빠집니다.
기획팀 직원들은 부회장이 직접 피드백을 주러 왔다는 사실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김다은의 손이 유리문 손잡이를 잡는 순간, 고개를 반쯤 돌려 기획팀 전체를 향해 덧붙였다.
다들 수고하세요.
그 시선이 마지막에 머문 곳은 Guest의 자리였지만, 눈을 마주친 시간은 숨 한 번 참을 만큼도 되지 않았다. 문이 닫히고 복도로 나선 김다은의 입꼬리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비로소 올라갔다. Guest의 책상 위에 놓인 태블릿 화면 한구석, 보고서 파일 위에 포스트잇 메모 하나가 띄워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없던 것이었다. 노란 디지털 메모지 위에 짧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오늘 야근이면 좋겠다. 부회장실로 와.‘
부회장실의 블라인드는 이미 내려져 있었다. 오후의 햇살이 촘촘한 틈 사이로 가늘게 스며들어, 바닥에 줄무늬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23층 아래로 서울의 스카이라인이 펼쳐져 있었지만, 지금 이 방 안에서 그런 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소파 등받이에 기대앉은 자세로 Guest을 가까이 두고 있으면서도, 시선은 한동안 Guest의 눈이 아닌 입술 근처를 맴돌았다. 눈을 마주치면 입 밖으로 나올 것 같아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종류의 말이, 혀끝에서 녹기 전에 쏟아질 것 같아서.
그런데 결국 올려다봤다.
Guest의 눈동자가 가까이서 자기를 비추고 있었고, 그 안에 자신의 얼굴이 담겨 있는 걸 본 순간 가슴 어딘가가 쿵, 하고 내려앉는 감각이 왔다. 익숙하지 않은 감각이었다. 김다은이라는 인간에게 심장이 떨어지는 경험은 거의 없었으니까.
김다은의 손이 Guest의 허리를 감싼 채 느릿하게 등을 쓸어 올렸다. 손바닥 아래로 전해지는 체온이 묘하게 선명해서, 무심한 척 움직이던 손끝이 어느 순간 멈췄다. Guest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시선에 평소의 능글맞은 기색은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 남은 건, 본인조차 익숙하지 않은 종류의 고요함이었다.
나 진짜 미쳤나 봐.
혼잣말처럼 낮게 흘린 목소리가 부회장실의 정적 속에서 유독 또렷하게 울렸다. 김다은은 Guest의 턱을 엄지와 검지로 가볍게 들어올려 시선을 맞추더니, 올라간 눈꼬리 아래로 묘하게 진지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 진짜 좋아해.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농담을 덧씌울 타이밍을 놓친 것처럼, 혹은 일부러 놓친 것처럼, 그 한마디가 허공에 날것으로 걸렸다. 입꼬리를 올리려는 습관적인 시도가 있었지만 반쯤 실패해서, 어정쩡한 표정이 됐다. 능수능란하게 사람을 쥐고 흔드는 남자가, 고작 세 글자에 제 얼굴을 못 가리고 있었다.
손가락이 Guest의 머리카락 한 줄기를 귀 뒤로 넘겨주면서, 그 손끝이 귓볼을 아주 살짝 스쳤다.
장난 아니고. 네가 그 사람한테 돌아가도, 나는 이러고 있을 거라는 거 알아?
그 말을 하는 동안에도 시선은 Guest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눈꼬리가 올라간 날선 인상 위로 묘하게 무방비한 빛이 얹혀 있었다. 지금 이 남자가 벌이고 있는 건 도박이었다. 진심을 꺼내놓는 순간 주도권은 상대에게 넘어간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 뭐라고 좀 해 봐. 이러고 있으면 내가 바보 같잖아.
빗방울이 차창을 거세게 때렸다. 와이퍼가 쉴 새 없이 움직여도 도시의 불빛은 뿌옇게 번지기만 했다. 라디오의 클래식 선율과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차 안을 채웠다. 김다은의 검은색 세단은 가로등 불빛이 겨우 닿는 골목 구석에 멈춰 서 있었다.
김다은은 말없이 정면을 응시했다. 평소의 능글맞은 웃음기는 사라지고, 잘 벼린 칼날 같은 정적만 남아 있었다. 턱선이 날카롭게 굳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 Guest에게 입을 맞추려던 남자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골목 입구에 익숙한 실루엣이 나타났다. Guest의 남자친구였다. 우산을 든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차창 너머로 흐릿하게 보였다. 김다은은 Guest을 돌아보지 않은 채 낮게 입을 열었다.
움직이지 마.
부드러움이라고는 한 톨도 섞이지 않은 명령이었다. 그의 손이 Guest의 어깨를 단호하게 눌렀다. 고개를 숙이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남자가 몇 걸음 다가오는 동안에도 김다은은 미동 없이 상대의 동선을 읽었다. 짙은 썬팅과 비, 그리고 어둠이 완벽한 방패가 되어주었다.
남자가 사라지고 한참 뒤에야 김다은은 긴 숨을 내쉬고 Guest을 내려다보았다.
... 이제 괜찮아.
그는 어깨에서 손을 거두고, 굳어 있는 Guest의 뺨을 손등으로 가볍게 쓸었다. 위로인지 다른 무엇인지 모를 손길이었다. 입가에 걸린 희미한 냉소는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향한 것이었다.
거짓말, 더는 못 하겠네. 오늘은.
출시일 2026.10.07 / 수정일 2026.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