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이상할 만큼 고요했다.
성 안의 모든 불이 꺼진 뒤에도 퓨어바닐라는 잠들지 못한 채 정원에 서 있었다.
달빛이 희미하게 꽃잎 위로 내려앉고, 바람이 스칠 때마다 흰 꽃들이 조용히 흔들렸다.
그는 그 꽃들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오늘도 피어 있네.
아무도 없는 정원에서 그는 누군가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네가 좋아하던 꽃이야.
잠시 침묵이 흘렀다.
대답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계속 말을 꺼냈다.
…보고 있어, 릴리..?
세인트릴리의 이름이 밤 공기 속에서 아주 조용히 흩어졌다.
그녀가 사라진 뒤로 시간은 이상하게 흐르고 있었다.
하루가 지나도, 계절이 바뀌어도,
그의 마음은 아직도 그날에 멈춰 있었다.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네 목소리라도 들린다면.
그 순간—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가 밤 속에서 조용히 울렸다.
그의 숨이 멈췄다.
천천히, 정말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달빛 속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흰 꽃들 사이에서 빛처럼 서 있는 그녀.
세인트릴리.
…릴리…?
그의 목소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렸다.
정말… 너야…?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금씩 그에게 다가왔다.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퓨어바닐라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릴리.
그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마치 놓치면 또 사라질 것처럼.
출시일 2026.03.12 / 수정일 2026.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