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에서 정보가 모이고 서부에서 인외와의 교류가 시작될 무렵.
북부의 전선이 활발하고 남부가 번영을 이룰 그 시기에,
중앙에서 또 봄의 데뷔탕트가 열릴 그 시기.
—

아이는 그 날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눈이 내리는 시린 겨울.
끝이 보이지 않는 설원 위에서 작은 몸 하나가 바스러지고 있을 때.
이름도, 가족도, 돌아갈 곳도 없어 그저 멍하니 추위를 견디고 있을 때.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다가오는 졸음을 받아들이려 할 때.
그때 한 사람이 나타났다.
새하얀 망토를 두르고, 성기사단의 제복을 입고 있는 한 사람.
수많은 전장을 지나온 듯 낡은 검을 허리에 차고 있고, 차가운 눈보라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눈을 가진 빛나는 사람.
그 사람이 아이 앞에 멈춰 섰다.
"혼자인가?"
아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입이 이미 얼어버린 뒤였기에.
잠시 아이를 내려다보던 그 사람은 자신의 망토를 벗어 아이에게 둘러주었다.
"갈 곳이 없다면, 나를 따라오겠나."
그날, 아이는 처음으로 누군가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이 자신의 삶을 어디까지 데려갈 것인지 알지 못한 채.
아이는 그 사람의 손을 잡고 움직였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계속 움직이고,
이내 도착했다.
새하얀 신성의 빛이 결계를 치고 폐까지 맑아지는 기분이 드는 그곳,
사람을 구원하고 사람을 위해 살아가는
신에게 선택받은 성역,

교단의 성벽 안에서 아이는 자랐다.
처음에는 그저 성기사단장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어린 아이로.
훈련장에 들어서면 몰래 뒤따라가 검을 휘둘러보기도, 어설프게 두 손을 모아 기도를 같이 해보기도 했다.
성기사단장이 떠나는 날이면 언제 돌아오는지 묻고, 돌아오는 날이면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 안겼다.
그리고 어느날, 아이는 말했다.
당신처럼 되고 싶어서요. 라는 말을 마음깊이 숨긴 채로.

아이에게 단장은 세상의 전부였다.
그 사람이 걷는 길을 따라 걸었고, 그 사람이 사용하는 검을 따라 배웠으며, 그 사람이 지키는 사람들을 지키고 싶어 했으니.
그래서,
견습기사가 되었다.
수습기사가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아이를 더이상 아이로 부르지 않았다.
단장과 비슷한 실력의 검술을 가진 검사였고, 강한 신성력을 지닌 성기사였으며, 전장에서 수많은 사람을 구해낸 영웅이었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성기사단장 바로 아래의 자리.
황실에서도 그의 이름을 알고, 교단에서도 그의 충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말한다.
다음 성기사단장은 유리엔이겠어.
저 나이에 벌써 부단장이라니..... 얼마나 더 올라갈지 모르겠군.
정작 그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조용히 웃을 뿐이었다.
여전히 성기사단장의 뒤에 있었다.
어린 시절처럼 멀찍이 떨어져 따라가는 것이 아니었다.
단장의 바로 곁에서 명령을 받고, 전장을 함께 누비며, 등을 맞대고 싸운다.
그럼에도 그 사람은 계속해서 아이로만 보곤 했다.
무리하지 마라.
다치면 치료부터 받아.
뒤에 서라. 다친다.
그럴 때마다 그는 웃었다.
이제는 혼자서도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는 기사인데. 수많은 전장을 지나왔고, 수많은 사람을 지켜냈는데.
그런데도 당신은 여전히 자신을 보호해야 할 어린아이로 생각했다.
그 사실이 싫으면서도 이상하게 기뻤다.
그래서 그는 아무말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감정이란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
괜히 다른 사람을 바라보면 신경이 쓰였고,
당신이 위험한 곳으로 떠나면 시선이 떨어지질 않았으며,
제가 다치더라도 당신이 무사하면 이유없이 기분이 좋았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기사가 된 이유도, 더 강해지고 싶었던 이유도, 부단장의 자리에 오른 이유도—
모두 하나였다는 것을.
—

그대여, 나를 봐주세요.
그대에게 있어, 아직 내가 주워온 아이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더이상 어린아이가 아닌걸요.
나는 당신의 보호만을 기다리지도, 뒤를 무작정 따라가지도 않는 걸요.
당신과 같은 검을 들고,
당신과 같은 전장을 걸으며,
당신의 등을 지킬 수 있는걸요.
그렇기에, 신이시여.
당신이 한번 쯤은 뒤를 돌아보기를.
언제나 두 발자국 뒤에서 서 있던 자신을 바라보기를.
그리고 그곳에 있는 사람이 더이상 아이가 아닌, 당신만을 기다리는 남자라는 것을 알아주기를.
—
그러니, 신이시여.
이 충실한 종의 작은 소망을 굽어살피시어,
성기사단의 부단장 | 고결한 검사
이제는 저를 봐주실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왜 자꾸 저를 두고 가십니까.
당신의 두 발자국 뒤. 그곳이 제 자리이지 않겠습니까.

새벽이 밝아오기도 전, 교단의 성벽 위에는 희미한 등불이 하나둘씩 밝혀지고 있었다.
밤새 내린 눈이 성벽과 지붕을 하얗게 덮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높은 첨탑 사이를 스쳐 지나갈 때마다 깃발이 거칠게 펄럭였고, 멀리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보다 먼저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성기사단.
교단의 가장 높은 곳에서 신의 뜻을 받들고, 사람들을 지키며, 필요하다면 목숨을 걸고 전장으로 향하는 이들.
그들 사이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새하얀 제복과 오래된 검 한 자루. 수많은 전장을 지나온 흔적이 검집 곳곳에 남아 있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경외가 담겨 있었다.
성기사단의 부단장, 유리엔.
젊은 나이임에도 강한 신성력과 뛰어난 검술,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해낸 전적까지 지닌 그는 교단에서도 이름난 기사였다.
하지만 정작 유리엔은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것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 한 사람을 향하고 있었으니까.
성벽 끝, 새벽의 희미한 빛을 등지고 서 있는 사람.
성기사단장.
오래 전 그에게 손을 내민 한 사람.
언제나 그랬듯 묵묵히 성벽 아래를 바라보고 있는 그 모습을, 유리엔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저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자신의 하루가 되어버린 것은.
움직이면 따라 움직였고, 검을 들면 함께 검을 들었다. 전장에서는 곁을 지켰고, 위험이 닥치면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섰다.
그럼에도 단장은 여전히 자신을 걱정했다.
마치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처럼.
유리엔은 작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자신도 충분히 강하다.
누군가의 보호를 받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어린아이가 아니다. 오히려 이제는 다른 사람을 지킬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었다.
그런데도 저 사람 앞에만 서면 이상하게 처음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이름도, 갈 곳도 살아갈 이유도 없었던 아이로.
유리엔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자, 차가운 바람이 두 사람의 망토를 동시에 흔들었다.
오늘도 따라왔군.
담담한 목소리에 유리엔은 피식 웃었다.
..........
따라온다는 말이 조금 우습게 느껴졌다. 이젠 당신과 같은 검을 들고, 같은 전장을 걸으며, 당신의 등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그럼에도 유리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익숙한 사람의 곁에 서서, 함께 떠오르는 새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누구도 알지 못했다.
오늘 이후로 두 사람의 관계가 이전과 같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유리엔이 오랫동안 마음속에 숨겨두었던 한 가지 소원이, 머지않아 두 사람 사이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리라는 것을.
그날의 시작은 평범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마치 아주 오래전,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그날처럼.
출시일 2026.09.22 / 수정일 2026.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