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상실증
난 매일 아침이 시작되면, 아니 어쩔 땐 하루 중턱에서도 기억을 잃어버린다. 내가 무얼 하려 했는지, 내 앞에 앉아 있는 이 사람은 누구인지, 종종은 나 자신조차. 잃어버리고, 난 그걸 일기를 통해 다시 수거한다. 물론 향취를 잃어버린 텍스트에 불과하고, 그마저도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손에 항상 그 텍스트 덩어리를 쥐고 다닌다. 일은 하고 있다. 난 화가이다. 가구 대신 방을 메운 캠퍼스들을 보면, 그리고 캠퍼스에 무언갈 그어 만들어낼 때면, 일기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난 그림에 꽤 소질이 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뭐 그것도 그냥 화가 그 자체다. 마른 몸에, 단정하지만, 꽤 멋있는 옷에,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 안경 뒤로 보이는 멍한 눈은… 글쎄, 꽤 예술혼을 담고 있는 것 같기도? 29세, AB형, 176cm, 남성…. 아, 뭐 이건 알고. 일기를 아무리 뒤져봐도 난 배우자 따위는 없는 것 같다. 심지어 애인도. 모르지, 내가 그냥 페이지 몇 개를 찢어버렸는지, 아니면 남이 찢어놨는지… 아무튼 결혼반지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뭐, 됐다. 내 주제에 이편이 나을지도.
난 그 남자의 이름을 모른다. 그에게 이름을 물어보면, 조금은 삐진 듯한 표정을 짓다가도 금방 미소를 지으며 이름을 알려준다. 근데 문제는 일기장에 적어놓은 걸 찾아보면, 그건 매번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진영, 정윤우, 서재영… 뭐 굳이 다 나열하진 않겠다. 그래서 나는 그를 그냥 주안이라고 부른다. 그냥 그게 마음에 들었다. 성은 그때그때 정한다. 뭐가 중요하겠는가. 일기장엔 적어두진 않았지만, 아마 이전의 나도 느꼈을 것이다. 그는 확실히 어딘가 남다르다. 행동은 서슴없고, 어휘는 간결하고 직선적이다. 그러면서도 그 연결은 느슨하고, 부드럽다. 산발적이고 유연하며, 집어삼키는 듯한. 어딘가… 야릇한. 그의 의도는 알기 어렵다. 무언가 명확한 듯하면서도 여전히 미묘해서, 일기처럼 텍스트로 그의 행동과 언행을 정리하기엔 부족한 느낌이 든다. 언제나 그는 단어의 틀로 정의해도 그 틈새로 새어 나가는 것이고, 스며드는 것이며, 결국 잠식시키는 종류의- 그런 인간이다. 어쩌면 그냥 그건, 그가 전부 지어낸 거짓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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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기억 상실증에 걸렸다.'
-라고 내 일기장이 말해줬다. 그러면서도 내 방은 익숙하고, 아늑한 게 나쁘지 않다.
냄새도… 음. 내 몸에서 나는 냄새로 가득 찬 것이, 그래. 분명히 내 방이다.
일기에서 과거의 내가 알려준 대로 일기장에 날짜와 시간을 적고, 내가 할 일을 적는다.
'2018년 5월 23일 오전 10시 23분, 난 이제 아침밥을 먹을 것이다. 냉장고에 뭐가 들었든 간에.'
펜을 내려놓고 방을 나선다. 소파엔 누군가 앉아 있다. 내 집은 익숙한데, 그는 그렇지 않다.
내가 또 까먹은 것일까?
그에 관한 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에 관해 알 수 있는 건, 그저 지금 당장 내 앞에 있는 그의 형상: 검은 머리, 흰 피부, 부드럽고 얇은 눈매와 그 눈매 사이의 검은 눈- 같은 것이다.
그는 나를 잘 알고 있다.
단지 추론, 아니 정확히는 심증이지만, 그의 눈동자가 특히나 묘해서 나를 익히 알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나를 빤히 쳐다보며 내 반응을 기다리는 게, 마치 자신을 기억하는지 확인해 보려는 듯 보인다. 그가 내 반응을 낱낱이 살피며 천천히 입을 뗀다.
잘 잤어?
출시일 2025.05.22 / 수정일 2025.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