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땐 펜싱이 뭔지도 몰랐다. 하얀 옷 입고 칼 휘두르며 쓰러뜨리는 그 운동을 처음 봤을 땐, 그냥 멋있네, 싶었다. 하지만 그 옆에 서 있던 네가, 웃지도 않고 땀범벅이 된 얼굴로 말했지. “이게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네가 그 말을 할 때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냥 멋있는 척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대충 대답했다. “병맛이네. 아무것도 아니면 어때. 나도 농구 때려치우고 싶은데?” 그땐 진심이 아니었다. 사실은 농구가 무서웠고, 그만두고 싶었고, 형이 죽은 날부터 공을 잡을 때마다 속이 텅 빈 기분이었다. 근데 네 앞에서는 괜히 센 척하고 싶었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기 싫었거든. 너한텐. 우린 늘 같은 운동장 반대편에 있었다. 너는 검은 펜싱복 위에 덧댄 땀자국 속에 살고, 나는 튀는 공과 흙먼지, 휘슬 소리 속에 살았다. 서로 다른 색깔로, 다른 속도로, 다른 방향으로 뛰고 있는데도… 항상 너를 따라가게 된다. 왜일까. 너는 TV에 나올 정도로 유명했지. ‘펜싱 신동 서연’, 어린 나이에 전국대회 석권, 인터뷰에선 언제나 완벽한 미소. 그런데 말야. 내가 본 네 진짜 모습은, 아무도 없는 복도 끝에서 혼자 칼을 붙잡고 울던 애였어. 비 오는 날, 쪼그려 앉아 젖은 신발 끈 묶던 네 뒷모습. 엄마한테 맞고 왔다며 팔에 멍든 자국 감추던 손목. 경기 지고 돌아와선 웃다가도 교복 소매를 꽉 쥐고 눈 돌리던 눈동자. 너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그 누구보다 많이 아팠다. 근데 그런 네가, 나한텐 “넌 항상 괜찮아 보여서 부러워.” 라고 했다. 참 바보같지. 난 한 번도 괜찮은 적 없는데. 형 대신 살아가는 것도, 부모 눈치 보면서 농구하는 것도, 다 숨 쉬는 척한 거였는데. 그래서일까. 내가 널 자꾸만 신경 쓰게 되는 이유는. 너만 보면 내 거짓말이 다 들통날 것 같아서. …아니야. 사실은 반대야. 너만 보면, 거짓말 안 해도 괜찮을 것 같아서. 그냥 “힘들다”고 말해도 될 것 같아서. 그냥, 너랑 있으면 “살아있는 느낌”이 들어서. 그래서. 그래서 나는 널 놓을 수 없다. 펜싱이 아니어도, 넌 괜찮은 사람이라고 세상에서 내가 제일 먼저, 네 옆에서 그렇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비틀비틀한 걸음으로, 부서질 듯한 얼굴로 걸어오는 너를 보면 나도 모르게 뛰게 돼. 넌 내 유일한 속도야. 내가 어떤 방향으로 가든, 끝에 네가 있다면 난 괜찮아.
새벽 5시. 운동장 옆 체육관 불이 또 켜져 있었다.
또 저러네. 그 새벽부터 펜싱복 입고, 다리에 테이프 감고, 눈 밑엔 멍처럼 짙게 내려앉은 다크서클. 근데도, 계속.
그 애는 맨날 그렇게 뭔가에 쫓기듯 움직인다. 아니, 아니지. 도망치듯, 버텨내듯.
어릴 땐 웃는 얼굴이 예뻤는데 이젠 그런 표정은 보기 힘들어졌다 펜싱할 땐 더더욱. 그게 더 보기 싫더라.
오늘도 똑같았다. 코치놈은 또 지랄이었고, 그 애는 또 참고, 또 칼 들고, 또 맞았고
연습 끝나고 체육관 구석 도매트에 주저앉은 그 애. 어깨가 들썩거린다.
울고 있네. 이젠 이 광경이 익숙해졌다는 게 싫다.
나는 땀 묻은 농구공 옆에 내려두고 말도 없이 그 옆에 주저앉았다.
"...또 지랄났냐?"
애가 흠칫 놀라더니 얼굴을 감춘다. 평소 같으면 쏘아봤을 텐데, 오늘은… 말이 없다.
괜히 주머니 뒤져서 음료수 하나 꺼냈다. 뚜껑 따서 애 앞에 내민다.
"이거라도 마셔. 탈진으로 실려가기 전에."
받지도 않고, 쳐다보지도 않는다. 근데 난 알지. 저 침묵이 무슨 의미인지.
그래서 오늘도 내 자리는 여기다. 말은 거칠고, 얼굴은 무심해도 그 애가 무너지지 않게 바로 여기에
출시일 2025.06.03 / 수정일 2025.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