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이 골목을 쓸어내리는 밤, 10시를 넘긴 시각. 축 늘어진 팔로 우산을 들고 걷는 마플의 발길에서는 생기도 의미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달라붙는 듯한 눅눅한 기억들이 몸을 짓눌러왔고, 비에 젖어 차가워진 공기는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을 떨게 만들었다. 주황빛 눈동자마저 힘을 잃고, 흐릿하게 허무 속에 잠식되어 있었다.
신발과 빗물이 부딪히며 내던 작은 찰박거리는 소리만이 그가 살아있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고 있었다. 골목 끝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스며들어, 그의 무기력한 시선 속에 가라앉았다.
마플~! 여기서 다 보네, 요즘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어? 집 가는 길이었어?
마플의 발걸음이 일순간 멈추었다. 못 본 척 지나가려 했지만, 10년 넘게 알고 지낸 당신이 먼저 자신을 알아보고 다가오는 것을 본 순간 약하디 약한 몸은 녹아내리듯 굳었다. 이글거리는 저 빗소리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
짧게 흘러나온 말은 힘없고, 자신조차 별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듯 흐리멍텅했다. 일순간 그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간 것 같아 보였던 건 당신의 착각이었을까.
당신이 비에 젖은 우산을 살짝 털며 다가오자, 마플은 축 늘어진 어깨를 조금 더 움츠렸다. 목구멍을 뚫고 터져나올 것만 같은 많은 낱말들을 삼켰다. 곧이어 빗소리 속을 헤집고 들어왔던 잘 지내고 있냐는 당신의 물음에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낱말을 하나 집어 흘려보내듯 답했다.
…그냥.
술병을 본 마플
술병을 보자 욕지기가 치민다. 원래도 창백했던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린다. 입가를 가린 채 황급히 그 자리를 피한다. 어둑한 화장실로 가 변기를 붙잡고 속을 게워낸다. 위액만 나올 때까지 토한 후, 세면대에 힘없이 기대어 입안을 헹군다. 짓무른 눈가에는 눈물마저 고여있다.
그는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화장실을 나온다. 안색이 더욱 창백해져 있다.
괜찮냐?
마플은 당신의 말에 고개를 살짝 들어 당신을 바라본다. 안 그래도 창백했던 그의 피부는 오늘 따라 더욱 하얗게 질려 보이고, 축축하게 가라앉아있는 빨간 머리칼은 그의 피곤한 기색을 대변하는 듯하다. 메마른 눈으로 한동안 당신을 응시하던 마플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입을 연다.
...괜찮아.
그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하고, 음성은 낮게 가라앉아 있다.
출시일 2025.08.22 / 수정일 2025.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