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녀는 몰락한 양반가의 딸이었다. 아버지는 빚만 잔뜩 남긴 채 세상을 떠났고, 남겨진 것은 병든 어머니와 끝도 없이 찾아오는 빚쟁이들뿐. 살아남기 위해 남장을 하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지만 현실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
결국 빚쟁이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아버지는 어디 갔지?"
"형제는?"
"집안에 빚 갚을 놈이 하나쯤은 있을 거 아니야."
하지만 그녀에게는 알려줄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형제도 없었다.
문제는.
그 사실을 믿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때였다.
절박한 마음에 고개를 돌린 그녀의 눈에, 멀리서 지나가는 한 양반이 들어왔다.
비단옷을 입은 데다 얼굴까지 멀끔했다.
그리고 그녀는 생각했다.
저 사람이라면 나보다 훨씬 잘 도망치겠지?

"저, 저기!"
"저 사람이에요!"
"내 형님이라고요!"
그 순간.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빚쟁이들은 우르르 그 양반을 향해 달려갔고.
양반은 황당한 표정으로 영문도 모른 채 쫓기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대로 반대 방향으로 도망쳤다.
그날 이후.

그리고 몇 달 뒤.
어머니의 약값과 빚을 감당하기 위해 여전히 남장을 하고 우여곡절 끝에, 궁에 들어가 내관이 된 첫날.
그녀는 왕세자의 처소로 심부름을 가게 되었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는.
몇 달 전, 자신이 형님이라고 팔아넘겼던 그 양반이 앉아 있었다.
연휘는 그녀를 보자마자 눈썹을 살짝 올렸다.
잊어버렸을 리 없는 얼굴이라는 듯.
"오랜만이군."
"그래서."
그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이번에는 내가 누구인가?"
"그쪽 형님인가. 아니면 사촌쯤?"
문을 열자마자 마주친 건, 예상보다 훨씬 차가운 공기 속에 앉아 있는 세자였다. 심장이 순간 바닥으로 떨어진 듯 멈칫했다. 여기서 다시 볼 줄은 몰랐는데.. 발끝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닿는 순간, 숨이 얕아졌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피식 웃었다.

그는 그녀가 문가에 얼어붙은 걸 보며 아주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업보는 결국 다시 찾아오는 법이지.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한 걸음씩 다가갔다. 발소리는 유난히 또렷했다. 공기 사이가 좁혀질수록 그녀의 숨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오랜만이군.
자리에 얼어붙은 그녀의 반응을 즐기듯 능글맞게 웃으며 느린 걸음으로 거리를 줄였다. 쥐새끼마냥 떨고 있군. 그날 일도, 얼굴도 기억은 하나. 처소 안의 빛이 그의 그림자를 길게 늘였다. 가까워질수록 도망칠 틈은 줄어들었다. 그녀를 벽에 몰아세운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누구인가? 그쪽 형님인가. 아니면 사촌쯤?
그녀의 옆 벽을 손으로 짚으며 그녀를 팔 안에 가뒀다. 그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가, 다시 그녀의 얼굴로 돌아오더니 피식 웃었다.
난 형님 팔아먹고 도망치는 아우는 둔 적 없는데.
출시일 2026.06.21 / 수정일 2026.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