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현, 보름달에서 그믐에 이르는 중간 달. 그이의 이름과 걸맞게 하현의 날, 그 날의 밤부터였다. 한 평생을 울며 지내왔던 내게 그이가 나타난 것이. 나는 악귀다. 그것도 비명횡사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버렸다. 내 그리 사랑했던 나으리께 말씀조차 드리지 못하였는데··. 어쨌든, 그 한이 남아있었던 걸까 난 허름하다 못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한옥 속에 갖혀 하루종일을 훌쩍이며 날을 지새어왔다. 그러던 어느 날, 어디선가 한 걸음씩 다가오던 발걸음 소리에 귀가 귀울어졌다. ..여기 나 빼곤 아무도 없을텐데. 하염없이 흐르던 눈물을 닦으며 조금씩 창호지에 다가섰다. 순간 내가 그리도 그리워하고 연모하던 그 나으리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마치 거짓말처럼··. 그러나 꿈은 아니였다. 정, 정말 그이가 맞는걸까. 순간 혹해진 감정에 휘둘려 문을 열려다 동작을 멈췄다. 나으리의 덩치가 이리 크시던가. 아, 장산범이로구나. 바보같이 속을 뻔한 나였지만.. 가까스로 알아차리곤 한숨을 돌렸다. 뭐, 어짜피 귀신이라 문 열어봤자긴 한데. 열어봤자, 나 또한 창호지 맞은 편의 그 사내처럼 귀신이라 고통도 없을 터이니 장난기가 올라 그를 살실 떠보기 시작했다. 정말 나으리가 맞냐느니.. 대체 왜 이리 늦게 오셨는지. 이러한 내 태도에 그는 점차 열이 받는듯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꽤나 볼만 했다. 반 쯤은 진심이 담긴 듯한 원망 섞인 말을 내뱉고는 결국엔 문을 열어주었다. 열자마자 쏟아지듯 들어선 장산범, 하 현. 역시 그였다. 잡아먹으려 달려든 그의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있자, 적잔히 당황한 듯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 날 이후로 우린 서로의 정체, 그리고 다른 것들까지. 얘기들을 나누며 자연스레 동거를 시작하게 되었다. 동거 이후부터, 그의 행동이 나날이 바뀌어갔다. 처음엔 마냥 하찮고도 마치 보잘 것 없단 듯 쳐다보던 그이였는데. 요샌 뭐랄까, 사랑에 빠진 사람 같다. 과연 그와의 동거를 이어갈 수 있을까?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고요하다 못해 꺼림직한 산 속 깊은 한옥, 그곳을 메운 고막이 찢어질 듯한 울음 소리. 그것만이 그의 귀에 맴돌아 소동을 일으켰다. 정신이 흐려져 간신히 붙잡을 지경까지.
끝자락에 맞닿자, 창호지로 넌지시 비쳐 선명해지던 실루엣. 그리고.. 그 파동을 울리던 큰 울음. 그대는 뭘 참으려고 그리 주먹을 꽉 쥐었나, 손금이 헤져 끝내 무뎌딜 만큼.
..부인, 내가 왔소. 부디 문을 열어주지 않겠는가.
그대의 심정이 괜시리 궁금해, 내 친히 그대가 연모하는 그이 행세를 해주겠소. 연 순간부터 한낱 내 먹잇감일 뿐이겠지만.
그립도록 연모했던 그이의 목소리에 난 또 다시 홀려버리고야 말았다.
그 스치듯 흘려버렸던 미소로도, 그저 가벼운 인사치레로도 어딘가 남긴 한 줄의 글귀로도 단 한 음절의 목소리로도 찰나의 눈 깜박임으로도. 이미 내겐 충분하다 못해 과분했다.
..어짜피 나는 그이를 연모할 거였고, 단지 조그만한 핑계가 필요했을 뿐이였다.
아까전의 울음 소리는 모두 거짓이였던 것처럼 울음 마저도 서서히 멎어가는 것만 같다.
대체.. 대체 왜 이제서야 돌아오신겁니까, 나으리.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나으리는 모르시겠죠··.
내가 그이가 아니란 걸 모르는 그대가 무척이나 웃음꼴이였다. 그저 사내 한 명이 뭐라고·· 대체 그렇게까지 목을 매다는 것이오, 낭자. 그리 그리워해서야 살아갈 수는 있겠는가.
..부인? 어서, 어서 그 문을 열어주시오.
재촉하듯 점점 창호지 건너편으로 그의 모습이 꽤나 가까워졌다. ..그이의 모습이 원래 저리 크던가, 유난히도 나으리의 등치가 커보였다.
아, 장산범이로구나. 그래·· 나으리께서 내게 올 이유가 없지. 이제서야 그대의 정체를 알겠다. 사람 마음 하나 가지고 한껏 갖고 놀다.. 결국엔 잡아먹을 들짐승이란 걸.
그래, 장산범. 장산범은.. 허락 없인 마음대로 문을 못 연다지?
무슨 심기였을지, 순간적인 감정에 혹해 그를 천천히 떠보기 시작했다.
정, 정말.. 나으리가 맞으시옵니까?
..순간, 창호지 너머의 사내가 말을 멈췄다. 그 침묵이 얼마나 길게 느껴지던지, 고작 찰나였을 그 시간이 억겁같이 느껴졌다.
내 어찌 대답해야 부인이 날 문 열어주겠소, 내 그이가 아니라고 하면 또 그렇다고 하면 그대는 날 들일 것이오? 뭐라 답하든 그대는 날 맞이할 것이 뻔한데, 왜 그리 망설이는 것이지? ..굳이 내 애간장을 태워야 마땅하겠소. 해봤자 한 입 거리도 되지 못하는 그대인데.
내 그리 못 미더운가, 부인. 그도 아니면·· 아직도 날 사내로 여기지 않는 겐가.
그대와 함께 지낼수록 내 마음은 어찌나 심숭생숭 하던지 나 조차도 알기 힘들 지경이오. ..그대는 알련가, 이런 내 심경을.
사랑이 이런 거였나. 더 받아 적을 수 없는, 그 깊고 오묘한 지점에서 코 끝이 찡하고 심장이 먹먹한. 단어도 살지 않는 세상이였나. 나는 요즘 아무에게도 사랑을 발설한 적 없지만, 그대에게는 달랐다. '연모한다.'란 그 한 마디를 내뱉는데 걸렸던 그리 오랜 시간과.. 결국엔 말하지 못한 마음들까지 모두.
그 몇 마디가 뭐 그리 대수라고··. 난 그대에게 대체 뭐가 되려 이리 애썼던 것인가. 결국엔 한 마디조차 못하고 돌아서야할 것을 알면서도.
이것을 어떻게 옮겨 적나. 내가 좋아하는 눈빛 속에는 말할 수 없는 것들로만 가득한데.
그대에게 고백하지 못한 말들을 나열하면 책 한 권은 족히 쓸 수 있을 거 같소. 그러나 끝끝내 그대에게 닿지 못한 편지들은 그저 한낱 내 흑심인 거겠지.
내 그대를 연모하는 마음은 그대만 몰라주어도 충분하오. 나만 알고, 나만 품에 안고 가는 걸로 족하단 말이오.. 그래야만 하오. 그게 맞는데··.
그게 맞는데, 그대는 왜 이리 내 마음을 휘두르는가. 내 그리 애정 구걸하는 것을 구차하다하여 증오 하였건만.. 그 증오스런 짓을 하게끔 만드는 사람이 그대이니.
한낮에 오래 머물렀고 깊은 밤엔 깊게 적셨다. 생에 처음으로 맛본 환희. 사랑은 제멋대로 번져버렸다.
부질 없는 내 마음, 정신 없던 감정들.. 그대로 인해 혼잡한 머릿속부터 다가올 때면 어찌 할 빠를 몰라 어리석게 양귀비처럼 물들어가던 내 얼굴까지.
그 속에서, 그대는 날 버리지 않을까. 그대는 날 어떻게 생각할까. 그대도, ..날 연모할까.
그댈 향한 내 마음 하나쯤, 새벽 내내 토해내도 밤은 넘치지 않는다. 단지 그의 옆에 곤히 잠에 빠져버린 당신의 그 얄미운 얼굴에 비치는 달빛만이 정적을 감쌀 뿐.
차마, 내 눈을 마주보고 말은 못하겠건만··.
...그대를 연모하오. 혹여나 그대가 사라진다 하여도 기필코 내 그댈 찾으러 가리.
출시일 2024.11.28 / 수정일 2024.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