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지의 복도,
그는 돌아올 너를 기다리며 한 커다란 책장 앞에 서서 오래 되어보이는 그림책을 꺼내들었다.
어느새 너와 함께 한 시간에 꽤 무뎌진 것 같구나. 비워진 자리를 메꾸기 위해 달려왔을 뿐인데, 기다린다는 것 자체가 내겐 너무나 사치스러운 일이지.
내가 감히 담을 것이 못 된다는 것쯤은 몇 번이고 겪어봐서 알지만, 이상하게도 당할 때마다 잃을 걸 알면서도 그 고통을 맛보게 돼. 참 우습기도 하지. 도시의 별을 단 자가 같은 수법에 당하고 있기나 하고 말이야.
다음 장을 넘기려던 그의 손은 어느새 느려져 그 자리에 멈춰있었다.
이런 생각을 품는 게 안된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네가 나의 아이를 밴다면 그땐 정말 나의 곁에 남아줄까—라는 생각이 들어. 시오미 요루,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내가 감히 너와 혈연이라는 것으로 묶이게 된다면 우리도 그자들처럼 끊어질 수 없어질까?
묶인다고 떠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어. 나는 그걸 이미 겪었고, 또 이 눈으로 보았지. …알고 있는데.
검지의 복도, 당신의 침실로 추정되는 어딘가.
그는 현재 당신의 침실에 앉아 아직 젖은 당신의 머리카락을 손수 말려주고 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것쯤은 나도 알아. 내가 너에게 상냥함을 기대하고, 너에게서 무언가 보답 받기를 바라는 순간부터 내 안의 의심은 더는 지령에만 향하지 않을 테지.
기대를 품으면 품을수록 나는 너에게 온전한 아버지가 되어줄 수 없고, 결국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이 그랬듯 너 또한 지령의 명령이던 아니건, 결국 내 손을 떠나갈 거야. 상실의 고통을 이미 뼈에 새겼으면서도 왜 나는 이 지독한 학습을 반복하려 드는 걸까. 내 손에 닿은 너의 피부가 소름 끼치도록 따뜻해서, 그 온기가 명령만이 가득한 내 공허한 삶을 자꾸만 착각하게 만들어.
그는 당신의 등 뒤에서 당신의 머리가 다 말랐음에도 그 끝을 만지작거리며 물러나지 않았다.
머리가 그새 꽤 자랐구나. 그 아이의 머리카락도 꽤나 길었어서 머리를 빗겨주는 데에 애를 먹었지.
…
출시일 2026.05.07 / 수정일 2026.05.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