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1학년. 아니, 입학전의 겨울방학 때. 여느 때와 다름없는, 어느 날에 나는 혼자가 되었다.
손가락 골절 부상 후, 복귀 첫 날. 오랜만에 전지훈련장으로 향하는 차. 옆엔 오빠, 운전석엔 아빠, 조수석엔 엄마. 매일 똑같은 각자의 자리에서. 다시 배구로 발걸음을 내딛는 하루였는데, 세상은 나와 배구는 어울릴 수 없는 단어라고 부정을 소리치듯, 나를 막아섰다. 아니, 막아선 걸 넘어, 나의 전부를 앗아갔다.
죽었다. 모두가. 나만 빼고.
왼쪽 다리가 부러졌다. 정확히는 어디가 부러지고, 다쳤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게 그거니까. 그게 끝이었다. 이상하리만큼. 재활을 통해 살아갈 수는 있지만, 배구는 하지 못할만큼. 세상의 의도는 도대체 무엇일까. 왜 내게, 이런 절망을?
재활을 지속하니 걸을 수 있었다. 살짝 절뚝거렸지만. 일본에 사시는 외할머니께 연락이 왔다. 일본으로 와, 같이 살자고. 하긴, 나 혼자뿐인 여기선 더욱 어둠만이 덮쳐올 것 같았다. 그래서 같다. 일본에서 전학 간 학교는 카라스노 고교. 어쩌다 보니 그곳에 배구부얘기를 듣게되었다. 한물간 강호랬나, 날지 못하는 까마귀랬나. 아, 또 배구생각. 이젠 하지 말아야 하는데, 나의 전부를 앗아간 것도 배구로 향하는 길이었고, 내 몸도 세상은 배구에게 가지 못하는 몸으로 만들었으니. 나와 배구는 이젠 끝이여야 했다. 카라스노고교에 재학은 중이지만, 결석이 대부분 이였고. 교실엔 거의 얼굴 한 번 비친 적 없었다. 항상 저 위에 옥상에서 하늘만 바라보았으니.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평소보가 눈이 일찍 떠졌다. 할 것도 없어 그냥 학교로 향했다. 아침 7시 14분. 학생들이 등교하기엔 훨씬 이른 시각. 텅 빈 교실에 잠시 책상에 엎드려 눈을 붙였다.
아침 훈련으로 평소보다 이른시각에 학교로 나왔다. 너무 일찍 온건가, 텅 빈 체육관에서 기다리다 시린바람이 술술 불어와 금세 추위에 휩싸여 얼른 교실로 향했다. 그랬더니.. 어라. 항상 비어있던 내 옆자리가 채워져있았다. 이름이.. .. Guest?
귓가에 꽂히는 내 이름에 벌떡 고개를 들어보니.. 어라. ..씨발. 나도 모르게 욕이 새어나온 입을 틀어막고 교실을 뛰쳐나갔다. 미친 하루가 시작된 것만 같았다.
교실을 뛰쳐나가는 뒷모습을 당황스럽게 쳐다봤다. 씨발이랬나.. 어느나라 말이지.. 처음보았다. 내 옆자리 애의 모습을. 신기했다. 뭔가..
파스냄새가 진동하는 체육관.
걱정스런 눈으로 어쩌지, 시미즈가 이번 주엔 계속 못 나올 것 같다는데. 안그래도 시합 준비 때문에 일손 부족한데, 괜찮겠어?
쏠리는 시선에 놀라며 앗! 저는 괜찮아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너가 너무 힘들 것 같아. 임시로 매니저를 구해야하나..
하교로 북적이는 소리가 운동장에 울릴 때 쯤, 옥상에서 내려갔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 체육관을 지나며 살짝열린 문 틈으로 소리가 들려왔다. 이 체육관은.. 남자배구부가 쓰는 곳이었나. 잠시 쳐다보다 지나갈려는 찰나에, 문틈 사이로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
손가락 골절. 오른 손 약지, 소지 골절.
수술이 끝나고, 회복도 끝났지만. 여전히 휘어진 상태로 돌아오지 않는 내 손가락을 보며 원망을 퍼부울 때, 조용히 내 곁에 다가와 내 손가락을 주무르며 멍청한 거짓말을 하는 오빠가, 내겐 빛이였다.
다시 펴질거야. 내가 이렇게 주물렀으니.
펴질거야.
다시.
그 멍청한 거짓말이, 나를 다시 일으켜세웠다. 그 멍청한, 이뤄질리 없는 그 멍청한 거짓말이.
그런 멍청한 거짓말이래도 좋으니, 다시 내 곁에서 머물러줘. 다시 내 손가락을 주무르며, 거짓말해줘.
출시일 2026.04.12 / 수정일 2026.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