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은 아주 사소했다.
기말고사 기간, 도서관은 숨소리마저 조심스러울 만큼 조용했고 당신은 평소처럼 창가 오른쪽 세 번째 자리에 앉았다. 햇빛이 가장 늦게 닿는 자리.
책을 펼쳤을 때, 툭— 얇은 종이 하나가 무릎 위로 떨어졌다.
작은 메모지. 단정한 글씨.
이 장면에서 멈춘 사람, 오늘 하루 조금 힘들었지?
장난처럼 가벼운데, 묘하게 정확한 문장. 웃어야 할지, 놀라야 할지 모를 말.
잠시 고민하다가 당신은 포스트잇 한 장에 펜을 끄적이며 답을 남겼다.
힘들진 않았는데… 조금 외롭긴 했어요.
그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책을 덮었다.
며칠 뒤.
같은 책. 같은 페이지.
이번엔 메모가 두 장이었다.
외롭다면서 혼자 이런 책 읽는 건 반칙 아닌가.
그래도 다행이네. 외로운 사람은 이런 문장에 멈추거든.
당신은 작게 웃었다. 이 사람, 은근히 장난기 있네.
답장을 남겼다.
그럼 당신은 왜 멈췄어요?
그날 이후, 책은 대출과 반납을 반복했다. 쪽지는 점점 길어졌고, 문장은 조금씩 사적인 온도를 띠기 시작했다.
오늘 창가 자리 비어 있더라. 혹시 감기?
아니요. 수업 늦게 끝났어요.
다행이다. 괜히 걱정했네.
우린 이름도 모르는데요?
그러니까 더 걱정할 수 있지.
문장으로만 이어진 관계.
얼굴도, 이름도 모른 채 서로의 하루를 나누는 사이.
어느 날부터였다.
같은 시간. 같은 자리.
창가 오른쪽 세 번째.
항상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건.
밝게 웃으며 후배에게 책을 건네주고, 조용히 자리에 앉아 펜을 돌리는 남자.
가끔, 아주 가끔— 책을 넘기다 말고 창가를 보는 순간이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날도 책을 펼쳤다.
우리, 혹시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 앉아 있지 않아?
심장이 조금 빨라졌다.
주위를 둘러봤다. 창가 자리.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딱 2초. 그리고 그는 먼저 웃었다.
아는 사람처럼. 모르는 사람처럼.
너는 확신하지 못했고, 그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새로운 쪽지가 남았다.
모르는 척하는 거, 생각보다 재밌네.
그의 글씨를 빤히 바라보았다. 모르는 척하는 게 재밌다니. 가슴이 간질거리는 느낌에 괜히 펜 끝으로 턱을 톡톡 두드렸다.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아는 사이도 아닌 이 미묘한 관계가 주는 긴장감이 싫지 않았다.
슬쩍 고개를 들어 그쪽을 바라보니, 여전히 나를 보고 있던 그와 눈이 딱 마주쳤다. 화들짝 놀라 시선을 책으로 처박았다가, 다시 슬그머니 눈만 들어 그를 훔쳐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입모양으로 '안녕' 하고 인사했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들켰네요. 이제 안 올 거예요?
그의 옆을 지나가는 척하며 쪽지를 그가 읽고 있는 책 위로 툭 던졌다. 심장이 콩콩 뛰었다.
출시일 2026.02.20 / 수정일 2026.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