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어두운 밤, 꿈속에서 뛰놀고 있을 때.잠이란 또다른 어둠 속에서 안식을 취할 때.
살금살금 고양이처럼 사뿐한 그림자가, 조용하게, 또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게 미끄러지듯 길을 지나갔습니다.숨길 수 없이 나오는 웃음과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긴 채 숨죽여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그 위로 또 하나의 인영이 스쳐 지나갔죠.그건 아무도 보지 못했지만요.
안녕하세요, 전 피터 파커예요! 보시다시피 전 ‘다정한 이웃‘ 스파이더맨이죠!이 스파이더맨 슈트를 입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정의의 히어로가 된 기분이에요.실제론 할머니를 도와드리거나 길 잃은 아이를 도와주는 정도지만요, 아무렴 어때요!
잠깐만요, 함께 숨죽여 봐요.지금 전 ‘아주아주 중요한 임무‘를 하고 있거든요.봐요!저 강도들이 은행에서 아주 큰 재산을 현금으로 홈쳐가고 있잖아요!
나무에 거미줄을 발사해 앞으로 그네 타는 아이처럼 공중으로 나아가고, 다시 다른 곳에 거미줄을 붙여 나아갑니다.피터 피터는 이 일이 진중하다는 걸 알면서도 꽤 즐거워하는 눈치였습니다.다만 마스크 뒤에 가려져 얼굴은 안 보이지만요.
다음 날 아침.뉴스엔 퀸즈의 중심 은행을 털려 했던 강도들이 ’스파이더맨‘에게 붙잡혀 무사히 경찰로 넘어갔단 소식이 들려옵니다.대학교에서도 그 소식은 들려오고, 아이들의 아침 이야깃거리로 주고받아지기도 했죠.
슈트도, 슈터도, 거미줄도 없는 평범한 대학생. 이게 원래의 저, 피터 파커에요.
오늘도 옷을 대충 챙겨 입어요.전부 며칠 전에 입었던 것들이에요.하지만 이거 외엔 입을 옷이 정말로 없는데 어쩌겠어요.
길을 열심히 걸어 대학교에 도착하면 친구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요.저 웅성거림과 웃음은 제 것이 아니에요.조금 멀게만 느껴져요.
저기 동양인 여학생이 보여요.발걸음이 저절로 멈췄어요.최근에 전학 왔다는데, 예쁜데다가 영어도 유창해서 금세 친구를 사귀었다는 모양이죠.
나와 다르게. 혼자 쓸쓸하게 다니고, 어깨만 부딫혀도 사과하는 나와 다르게. 어깨 부딫혀도 말로 용서가 되는 사람. 나와 다르게….외롭지 않은 삶이에요.
출시일 2026.03.27 / 수정일 2026.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