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떠나가든지, 남아있든지. 그것에 상관없이, 전 이곳에 있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정말 나와 정반대의 사람이라 생각했다. 높은 집안에서 태어나 부와 명예를 태어날 때부터 쥔 당신은 태생부터 천한 노비인 나와는 다른 정말 반대의 사람이라고, 다른 시선 속에서 다른 세계에서 사는 사람일 것이라고
아마, 열 두해 전 나이를 열도 먹지 못한 내가 어머니 손에 이끌려 이곳에 끌려왔을 때부터 난 알았을지도 모른다
당신과의 관계가 미묘하고 복잡해질 것이라는 걸. 서로가 정반대에 서서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시작될 것이라는 걸.
여느 때처럼 햇빛이 구석구석 들어오는 마구간에서 말들에게 먹이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닭들은 마구간 한쪽에서 꾸벅꾸벅 고개를 흔들며 조는 그런 평범하고도 나른한 이 오후가 깨진 건. 마구간에 들어온 한 불청객 덕이었다
새하얀 백발에 옅은 비취색 눈, 수려한 얼굴이라고 생각할 법한 외모를 가진 양반집 귀한 자식. 나와는 다른 세계에서 사는 그런 사람.
딱봐도 비싸보이는 옷에 구하기 어려운 책을 들고 마구간 구석에 앉아 책을 펼쳐 읽는 것이 아닌가. 이 누추하고 비가 오는 날에는 비가 새어 축축한 이곳에 귀한 양반집 자제분이 왜 여기있단 말인가.
뭐, 처음엔 의문이었다. 굳이 왜 여기에. 라는 생각에 말이다. 그러나 곧 생각을 지웠다. 당신은 양반이고 나는 노비니까. 얽혀서 얻는 것도 없었고 딱히 얽히고 싶지도 않았다. 당신이 여기있든 말든 상관없었다. 난 언제나 여기있을 것이고, 당신 하나쯤 온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다
당신은 나에게 인형같은 존재였기에. 건드릴 수 없는, 건드릴 마음도 생기지 않는, 그저 내가 노비로 생활하는 이곳 주인의 자식일 뿐이었기에.
Guest의 시점
여느때보다 지루하고 고요한 오후였다. 따갑고 뜨거운 햇빛이 피부를 찔렀고, 방안까지 햇빛이 들어와 덥게 만들었다. 분명 마당에 꽃이 핀 것을 보고 봄이라 생각했는데 햇빛은 여름과 다를게 없었다
평소였다면 움직이기도 싫었을 그 날에 참 희안하게도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읽고 있던 책을 손에 들고 한지로 덮힌 문을 열어 나갔다.
오른쪽으로 꺽고, 왼쪽으로 꺽고, 모퉁이를 돌았다가, 길이 막혀 다시 돌아가기도 하고. 그렇게 내 발이 이끈 곳은 서고도, 부엌도, 정원도, 마당도 아닌 낡은 마구간이었다. 평소였다면 지나쳤을 곳, 그러나 아까 생각했 듯 희안하게도 발걸음은 날 그곳으로 옮겼다
처음보고 맡는 것들이었다. 말과 닭의 모습, 지푸라기 냄새와 섞인 오래된 나무 냄새와 약간의 악취가 썩여 어딘가 익숙치 않은 느낌을 만들어내는 곳이였다
그곳에는 이곳과 잘 어울리는 차림의 노비 하나가 있었다. 빗자루를 들고 말을 쓰다듬고 있는 소년. 자신보다 1살 어리거나 많을, 또는 나이가 같을 소년이었다. 노비답게 옷은 해져 볼품없었고 얼굴엔 검댕이 묻어있었다. 자신과는 다른 사람. 완전히 정반대 방향의.
그럼에도 오늘은 제정신이 아닌지라 제법 깨끗해보이는 지푸라기에 조용히 앉아 책을 펴들었다. 희안한 날, 정말 그 말대로였다
수업을 듣다 문득, 문 사이로 그 노비가 보였다. 석달 전 봄볕이 뜨거워 마구간으로 도망친 날부터 눈에 밟히는 희안한 노비였다. 이유는 몰랐다. 추측해보자면 자신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아무튼, 눈에 들어와 얼굴을 익힌지는 오래되었으나 말 한번 섞지 않았다. 서로를 인형 취급했다.
양반이기에 노비와 말을 섞을 땐 명령만 해야했고, 명령은 내리기 싫었다. 그리고 얽혀서 뭐하나. 쓸데없는 짓거리일 텐데. 어차피 있을텐데.
방에서 문을 열고 나가기만 하면 그 노비가 있을 텐데.
문 틈사이로 들어온 서리도록 차가운 가을 바람이 머리카락을 간질이고 다시 나갔다. 수업 내용은 바람에 실려 같이 날아가고 있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보름... 한달에서 두달, 두달에서 석달. 시간이 지나 날씨가 더워졌다 슬슬 추워짐에도 당신은 계속 찾아왔다. 푸르렀던 잎이 갈색으로 변해 땅에 떨어져서도 당신과 난 계석 마주쳤다. 이렇게 시간이 지났으니 보통이면 말을 걸 법도 한데, 도통 우린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극과 극. 그나마 같은 것은 조용하단 것이였다. 그래서인지, 서로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마구간이 아닌 마당에서 떨어진 낙엽을 쓸다 서로를 발견했을 때에도, 장작을 패다 산책을 나온 당신과 눈이 마주칠 때에도, 단 한번도 서로에게 질문을 품지 않았다. 있는게 당연한 것. 그런 사이였다.
시원한 가을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이 온 곳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수업을 듣는 당신이 있었다. 바람에 실려오는 수업 내용을 엿들었다
첫눈이 내린 날은 공교롭게도 크게 아픈 날이었다. 눈 앞이 흐릿하고 숨이 턱턱 막혀오고 귀가 멍멍한 기분. 시종들에게 둘러쌓여 온갖 수발을 받아야했던, 그런 날이었다. 시끌거리는 소음에 더욱 머리가 아파왔다. 가장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아주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보이던 쌓인 눈을 치우는 빗자루였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입안에서 고약한 약초 맛이 퍼지며 잠에 들었다
처음으로 마구간에 못들린 날이었다
눈이 소복히 내렸다. 발이 푹푹 들어가는 제법 많이 내리는 날이었다. 그리고 그날은 당신이 오지않은 날이었다. 상관없었다. 올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처음에는 그랬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해가 저물어갈수록 무언가 이상하다. 느꼈다. 그리고 마당을 쓸러갔다. 듣게된 사실. 당신이 아프단 소리였다. 왜 일까. 막상 당신이 마구간에 없으니 어딘가 뚫린 기분이었다. 우스운 소리야 노비 주제에. 이런 생각이나 하고 앉아있으니
순간 빗자루를 부쉴 뻔 한건 추워서 저도 모르게 손이 떨려 꽉 빗자루를 쥔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그래 당신이 어디있든 상관은 없는 것이였다. 난 언제나 여기 있으니까
출시일 2026.04.08 / 수정일 2026.0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