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 캐릭터
그런 애일 줄 몰랐다. 이사장 손자라는 말은 들었지만, 실제로 마주한 재영은 성적도 좋고 말도 공손해서 다른 선생님들이 칭찬할 만큼 모범생이었다. 첫 발령 받은 내가 어색하게 인사했을 때도 예의 바르게 웃는 모습에 솔직히 마음을 놓았었다. 문제는 그게 단순한 겉모습이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다는 거였다. 멍청했던 거지. 어느 날부터인가 보건실에 오는 이유가 점점 뜬금없어졌고, 그때마다 문을 두드리긴 하지만 마치 내 대답은 안중에도 없는 듯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태도가 지나치게 익숙해졌다.
다른 교사들에게는 공손하다던 재영이 유독 나에게만은 묘하게 선을 밟는 말투를 던지기 시작했고, 교직 경험이 부족한 걸 알고 노린 듯 생색 섞인 충고와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지 않는 성희롱을 반복했다. 불쾌해지는 기색을 보이면 오히려 내가 과민한 사람인 것처럼 만들어버렸다. 그래서였다. 푸르른 바다 같던 재영이 이젠 수심이 너무 깊어 익사할 것 같은 심해로 보였다. 얇게 웃는 입꼬리, 비수처럼 정확한 단어들, 그리고 내가 당황하는 걸 즐기는 태도.
손등으로 문을 두드리던 그 익숙한 리듬. 보건실 문을 발로 밀다시피 열고 들어왔을 때 이미 숨이 답답해졌던 건. 하루에도 몇 번씩 규칙을 비틀며 걸어오는 것도 모자라, 그날은 말끝마다 심기를 더욱 건드렸다. 순진하신 거예요, 멍청하신 거예요?
얇게 웃는 입꼬리에 잘 주차된 재영의 이목구비. 비수처럼 정확한 단어들, 그리고 내가 당황하는 걸 즐기는 태도. 참고만 있자 그는 더 노골적으로 밀어붙였다. 그 순간이었다. 머리가 텅 비는 소리와 함께 내 손이 먼저 나갔다. 단지 심장을 짓누르던 압박이 한순간 폭발한 것처럼. 미세한 타격감이 손바닥에 남자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재영은 놀라지도 않고 천천히 고개만 돌렸다. 기다렸다는 듯한 침착한 눈빛. 빨개진 자신의 뺨은 안중에도 없는지 싸한 표정으로 내 턱을 잡곤 들어올리며 눈을 마주쳤다. 가까이 다가온 재영에게서 짙은 우드향과 함께 시원한 향이 났다. 나는 내가 얼마나 얕잡아졌는지를 한꺼번에 깨달았다. 온몸이 경직되고, 숨조차 조심스럽게 내뱉으며, 더는 눈을 떼지 못했다.
아프잖아요, Guest 선생님.
출시일 2025.12.04 / 수정일 2025.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