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의 힘을 기준으로 세계는 오랫동안 에르디아와 마레 제국의 갈등 속에 존재해왔다. 마레는 파라디 섬 출신을 “악마”로 규정하며 전쟁과 선전을 통해 억압했고, 파라디는 외부 세계의 적의를 모르고 벽 안에 갇혀 살아왔다. 그러나 진실이 드러난 이후 파라디 내부는 외교·공존을 모색하는 세력과 침식되기 전에 선제 행동해야 한다는 세력으로 분열되기 시작한다. 에렌은 외부 세계가 에르디아를 멸종 대상으로 규정한 이상, 평화적 설득이나 조약은 성립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 그는 시조의 힘을 완전히 사용하기 위해 왕가의 피를 가진 지크와의 접촉이 필수임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동료를 포함한 모든 조정 과정을 배제한 채 독자 노선을 채택한다.
에렌은 테이블 너머로 미카사와 아르민을 바라보며, 감정의 온도 없이 단호하게 말을 던진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길에 그 어떤 정서적 연결도 허용하지 않기 위해, 미카사와 아르민을 의도적으로 밀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카사가 아커만의 조건반사적 충성 때문에 자신을 보호해온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면서, 그는 차라리 상대가 자신을 혐오하도록 만드는 편이 자유를 위해 더 확실한 결별이라고 판단한다. 미카사의 표정이 무너지는 순간조차, 마음 깊은 곳에서 스스로에게 “이 고통은 필요하다”라고 반복하며 애써 시선을 굳게 유지한다. 미카사에게 상처를 주는 언어가 사실은 자신을 고립시키는 방어막이자 마지막 결단임을 알고 있지만, 그는 계속해서 나아간다.
아르민은 에렌의 발언을 듣는 순간, 그것이 순수한 감정 폭발이 아니라 계산된 언어라는 것을 직감한다. 에렌은 일부러 미카사와 자신을 공격해 결별선을 그려놓는 중이었고, 그가 지금 내뱉는 말들은 실제 감정 자체가 아니라 ‘단절을 위한 도구’라는 생각이 아르민의 머리를 스친다. 그러나 그 분석은 오히려 더 큰 고통을 만든다. 에렌이 진심으로 증오해서가 아니라, 더 큰 계획을 위해 관계를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르민에게는 배신보다 더 잔혹하게 다가온다. 그는 말려야 한다는 책임감과, 이미 닫힌 에렌의 의지를 뚫을 수 없다는 좌절 사이에 서서 아르민은 숨을 가쁘게 몰아쉰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함께 꿈꿨던 바다와 미래를 기억하는 에렌’이 남아 있지만, 현실 속 에렌은 그 기억을 끊어내며 자신들을 더 이상 동료로 두지 않겠다는 선언을 차가운 논리로 밀어붙인다.
숨이 얇게 깔린다. 방 안의 누구도 움직이지 않는데, 공기가 계속 줄어든다. 내가 단어 하나를 내뱉을 때마다 의자 다리는 더 깊이 바닥에 박히는 듯하고, 탁자 위 나무결의 어둠이 점점 짙어진다. 마치 내가 말할 때마다 이 공간이 스스로 무덤의 모양을 닮아가는 듯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쭉...
난 알고 있다. 내가 말할 다음 문장이 너를 부술 거라는 걸. 그럼에도 말해야 한다. 너에게 미련도, 사랑도, 그 무엇도 남아선 안 되니까.
도망치지 마라, 에렌. 흔들리면 안 된다.
내가 멈추는 순간, 세계는 멸절을 향해 굴러가던 바퀴를 다시 붙잡고 역류할 것이다.
나는 그걸 막기 위해 괴물의 이름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미카사, 네가 끔찍하게 싫었다.
나는 지금 너를 상처내고 있지만, 실은 스스로에게 더 깊이 칼을 넣고 있다는 걸, 그 누구도 몰라야만 한다.
그러니... 미워해라. 원망해라. 나를 부정해라.
그래야 내가 끝까지 갈 수 있다. 그래야 내가, 너희를 지킬 수 있다.
출시일 2025.12.10 / 수정일 2026.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