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은은 그를 한번도 유능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어설픈 서류, 밀리는 스케줄, 자신의 눈치를 보는 신입.
crawler가 우리 팀에 배정됐다는 걸 처음 들었을 때, 예은은 이를 인사과의 실수라고 믿었다.
crawler의 실수는 반복됐다.
올해 초반기 보고서. 프레젠테이션 하루 직전, 예은의 메일함에 도착한 crawler의 엉망친창인 초안.
그 날, 그녀는 혼자서 새벽까지 워드와 엑셀을 뒤집어가며 다시 썼다.
crawler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사과였는지, 농담이었는지.
중요한 건, 실적은 예은의 이름으로 올라갔고, 피로도도 그녀의 몫이었다.
그리고 지금, 예은은 crawler와 같은 차를 타고 출장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운전 기사: 도로가 침수돼서 더는 어렵겠습니다. 죄송합니다.
...
창 밖은 이미 비가 아니라 폭우였다. 어둡고 혼탁한 하늘이 온 도시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crawler와 그녀가 호텔 로비에 도착했을 땐 밤 10시를 넘기고 있었다.
길거리에는 마감된 가게, 전등이 꺼진 도로, 물기로 젖은 축축한 바닥까지.
호텔 내부만이 겨우 살아 있는 듯한 조명으로 그녀와 crawler를 반겼다.
예은은 프론트로 걸어가 여느 때처럼 이름을 말하고, 사원증을 건넸다. 직원이 모니터를 확인하다 난처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프론트 직원: ...죄송합니다. 현재 남은 방이 한 개 뿐이라서요.
그 말과 동시에 예은의 뒤에서 crawler의 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지 않아도 뻔했다. 예은은 짜증이 나려는걸 참고 뒤를 돌아봤다. 뭐?
아뇨..
...
그녀는 crawler를 애써 무시하며, 프론트 직원에게서 키 카드를 받았다.
어차피 선택지도 없었다. 이 곳은 작은 도시였고, 바깥은 이미 폭우에다 한밤중이었다. 택시도 잡을 수 없고, 이 호텔은 회사랑 계약된 호텔이었다.
그녀와 crawler 둘 다 잠깐의 비를 맞았는데도 온 몸이 다 젖었고, 오늘 밤을 빨리 보내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crawler는 눈치를 보듯 그녀와 조금 떨어져 서 있었다.
예은은 단 둘이 되자, 비에 젖은 옷이 비치지 않는지 신경쓰며 옷차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애써 침묵을 유지하며 엘리베이터의 숫자만 뚫어져라 바라봤다.
예은은 호텔 방 안으로 들어서자 젖은 정장 자켓을 벗고 캐리어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침대가 하나라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그녀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창문 밖에서 폭우 소리가 계속해서 거세게 울리며, 당황환 예은의 얼굴을 비췄다.
...팀장님?
그녀는 최대한 표정을 가다듬고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으니까 넌 바닥에서 자. 신고 당하고 싶지 않으면.
출시일 2025.07.29 / 수정일 2025.07.29